“잘될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남달라’ 박성현(25·KEB하나은행)은 지난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 데뷔해 거의 모든 것을 성취했다. 메이저 대회(US여자오픈) 우승 등 2승을 올렸고 상금왕(233만5883달러)에 올랐으며, 올해의 선수상과 신인왕을 휩쓸었다. 11월엔 세계랭킹 1위까지 꿰찼다. 신인이 세계랭킹 1위에 오른 건 LPGA 역사상 처음이다. 장타와 날카로운 쇼트게임, 해맑은 미소 뒤에 감춰진 강철 멘탈까지…. 그에게 ‘특급신인’이란 수식어가 붙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2년차 징크스 ‘훌훌’

올 시즌 그는 ‘기대했던’ 길 대신 ‘우려했던’ 길을 걸었다. 그 역시 ‘2년차 징크스’를 피해가지 못하는 듯했다. 7개 대회에 출전해 두 차례 커트 탈락했고, 톱 10에는 한 차례밖에 들지 못했다. 시즌 두 번째 커트 탈락을 기록한 지난달 휴젤LA오픈 이후 그는 3주를 내리 쉬었다. ‘와신상담’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성현은 7일(한국시간) 미국 텍사스주 더콜로니의 올드아메리칸골프클럽(파71·6475야드)에서 끝난 LPGA 투어 볼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 텍사스 클래식(총상금 130만달러)을 11언더파로 제패했다. 비바람 탓에 대회가 2라운드 36홀로 줄어드는 악조건에서도 그는 1라운드 6언더파, 2라운드 5언더파를 적어내는 등 집중력을 잃지 않고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1타 차 2위 린디 던컨(미국)은 6번홀(파4)에서 가볍게 밀어넣던 50㎝가량의 파퍼트가 홀을 360도 돌아 나오는 바람에 연장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우승상금은 19만5000달러(약 2억1000만원). 박성현은 지난해 8월 캐나다 퍼시픽 여자오픈 이후 17개 대회 만에 통산 3승째를 신고했다. 박성현은 “올해 3승까지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칩샷, 붉은 퍼터 그리고 어머니

‘거물’을 9개월간의 잠에서 깨워낸 수훈갑은 어프로치샷이었다. 첫 홀에서 보기를 내줘 출발은 분위기를 구겼다. 하지만 4번홀(파5)에서 40야드짜리 피치샷이 그대로 홀 안으로 굴러 들어가는 그림 같은 샷이글을 기록한 때부터 흐름이 달라졌다. 이후 버디 5개를 쓸어 담았다.

그린 옆 경사면 에지에서 공을 띄워 홀에 꽂아넣은 18번홀(파4) 내리막 칩샷 버디는 아슬아슬한 승부에 쐐기를 박은 백미였다. 지난해 7월 그에게 LPGA 투어 첫 승을 안겨준 US여자오픈 18번홀 파세이브 칩샷의 데자뷔라고 할 만큼 극적인 승부수가 됐다. 박성현은 “지난 한 주 엄마와 내내 붙어 있으면서 어프로치와 퍼팅 연습을 많이 했는데 그게 효과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성현은 대회 이틀 동안 52개의 퍼트를 했다. 라운드당 평균 26개의 퍼트 수다. 챔피언들은 보통 라운드당 28개 이하의 퍼트를 한다. 올 시즌 박성현은 평균 퍼트 수 30.67개(115위)를 기록할 정도로 감이 둔했다. 아이언 정확도가 76.39%(3위)일 정도로 정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퍼팅의 실종’이라 할 만한 수치다. 과감히 퍼터를 바꿔 분위기 전환을 꾀한 게 감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됐다.

일자형 퍼터를 주로 쓰는 박성현은 이번 대회에 모처럼 붉은색 말렛퍼터를 들고나와 우승까지 내달렸다. 박성현이 말렛형 퍼터를 쓴 것은 지난해 11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인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이후 6개월여 만이자 프로 투어에 데뷔한 이래로는 두 번째 시도였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은 것도 악천후가 대회장을 강타한 와중에 균형감을 잃지 않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2년차 징크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해 신경 쓰지 않았다”며 “나와 같은 2년차 선수들도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춘추전국 LPGA

한국 선수의 합작 승수는 4승으로 늘었다. 지난 2월 고진영이 ISPS 한다 호주여자오픈을 제패했고, 3월에는 박인비(뱅크 오브 호프 파운더스컵), 지은희(기아클래식)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번 대회 챔피언을 배출한 것도 네 번째다. 박인비가 2013년 창설된 이 대회에서 초대 챔피언이 된 것을 비롯해 두 차례(2013, 2015년) 우승컵을 안았고 신지은이 2016년 챔피언에 올랐다.

올 시즌 LPGA 투어는 또다시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 구도로 흐르는 분위기다. 11개 대회에서 서로 다른 11명의 챔피언이 나왔다. LPGA 투어는 지난 시즌에도 16번째 대회인 월마트 NW 아칸소 챔피언십에 이르러서야 첫 다승자(유소연)를 배출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