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이 닦아 놓은 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골프여제’ 박인비(30·KB금융그룹)가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를 탈환했다. 2015년 10월 이후 2년6개월 만이다. 손가락, 허리 부상을 모두 극복하고 얻어낸 값진 성취다. 박인비는 “1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회 때마다 한 샷 한 샷에만 집중했다. 세계랭킹 1위는 그 선물”이라고 말했다.

‘퀸비’ 전성기는 진행 중

박인비는 23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휴젤-JTBC LA오픈(총상금 150만달러)에서 4라운드 최종합계 10언더파를 기록해 고진영과 함께 공동 2위에 올랐다. 우승은 12언더파를 친 모리야 쭈타누깐(태국)에게 돌아갔다. 투어 데뷔 6년 만의 생애 첫 승. 친동생 에리야 쭈타누깐(통산 7승)과 함께 자매 챔프가 되는 진기록도 세웠다. 68년 LPGA 역사상 자매가 챔피언에 오른 사례는 2000년 2주 연속 우승컵을 들어 올린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샬롯타 소렌스탐 자매가 유일했다.

박인비는 나흘 동안 66-71-69-68타를 적어냈다. 골퍼들이 가장 싫어하는 잔디 ‘포아애뉴아’의 울퉁불퉁한 굴곡에 걸려 짧은 퍼터를 넣지 못하는 등 고전했다. 하지만 끝까지 팽팽한 우승 경쟁을 펼친 끝에 준우승과 세계랭킹 1위라는 선물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준우승 상금 12만105달러(약 1억3000만원)를 받은 그는 시즌 총상금을 70만7089달러로 늘려 상금랭킹 1위를 지켰다.

박인비는 올 시즌 6개 대회에 출전해 우승 1회, 준우승 2회, 3위 1회를 수확했다.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시즌 초반 경기력이다.

부상 이겨낸 ‘불굴의 투혼’

박인비는 세계랭킹 1위를 내준 2015년 10월 이후 두 번이나 큰 부상에 시달렸다. 허리에 먼저 이상이 왔다. 2016 시즌 개막전이던 바하마클래식을 허리 부상으로 기권했다. 1라운드 스코어가 7오버파였다. 허리가 호전되자 이번엔 왼손 엄지손가락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대회 2개를 연속으로 기권해야 했다. 브라질 하계올림픽을 두 달여 앞두고 열린 메이저대회 KPMG 챔피언십에서는 이틀간 9오버파를 치고 커트 탈락해 올림픽 출전 자격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해 8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106년 만에 금메달을 따내 ‘여제’의 위엄을 재확인했다.

이후 시즌을 통째로 쉰 박인비는 지난해 3월 16개월 만에 18번째 우승컵을 거머쥐며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이번엔 허리 부상이 다시 도졌다. 8월 브리티시여자오픈에 출전해 공동 11위라는 준수한 성적표를 받았지만 숙소에서 넘어져 다친 허리가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나머지 시즌을 접어야 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선수 특유의 피로감, ‘번아웃(burn-out)’ 증후군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박인비는 올해 다시 필드로 돌아왔고 ‘1인자’의 자리에 오르며 ‘여제의 귀환’을 각인시켰다.

세 번째 1위 탈환

대회 전 세계랭킹 3위로 당시 1위 펑산산(중국)을 0.38점 차로 추격하던 박인비는 24일 발표될 랭킹 포인트에서 1위로 올라설 예정이다. 펑산산이 이번 대회에서 12위에 그치면서 준우승한 박인비가 순위 역전에 성공했다.

LPGA투어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현재 세계랭킹 3위인 박인비가 이번 대회 준우승으로 23일자(현지시간) 세계랭킹에서 1위에 오르게 됐다”고 발표했다. 박인비는 2013년 4월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오른 뒤 2015년 10월까지 총 92주 동안 1위를 지켰다. 이후 리디아 고, 에리야 쭈타누깐, 박성현, 유소연, 펑산산 등 5명이 박인비의 자리를 거쳐갔다. 2006년 세계랭킹 제도가 도입된 이후 1인자 자리를 거쳐간 이는 모두 13명. 이 가운데 한국인은 신지애, 박인비, 유소연, 박성현 등 4명이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