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옥의 인문기행 (4) 중국 지린·난징·우한·충칭…조선의용대 김원봉의 흔적

1919년 의열단 만든 뒤 총독부 폭파 등 독립운동 펼쳐
상하이·난징 떠돌다 우한에서 의용대 창설
해방 맞았던 충칭 집은 과일가게로 덩그러니 남아
1930년대 김원봉과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이 거주하던 후자화위안.

1930년대 김원봉과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이 거주하던 후자화위안.

김원봉은 스물한 살에 조국을 떠나 중국 대륙을 떠돌며 28년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0년대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총독부에서 경찰서까지 경성은 물론이요, 상하이에서까지 총과 폭탄으로 일제를 공격했다.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이었고 식민지 경찰에게는 공포였다. 1930년대 군정학교를 세워 이육사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를 독립투사로 키워냈다. 열사의 의열단을 민족혁명당으로 확대시켰고 그 위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만주에서조차 총소리가 잦아든 1940년대 일제를 향해 직접 전투를 벌인 유일한 무장대오가 바로 조선의용대였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북한에서는 정적으로 숙청돼 완벽하게 삭제됐고, 남한에서는 사회주의로 낙인 찍히며 현대사에서 변두리로 밀어냈다. 그래도 누군가는 기록을 남겼고, 누군가는 연구 주제로 삼았다. 누군가는 영화 <암살>과 <밀정>에 ‘특별출연’시켰다. 나는 김원봉의 흔적을 찾아 네 번에 걸쳐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지린성 거점 두고 의열단 창설

 충칭에서 김원봉이 거주하던 집에는 현재 과일가게가 들어섰다.

충칭에서 김원봉이 거주하던 집에는 현재 과일가게가 들어섰다.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종로서, 조선총독부 폭파, 상하이 와이탄에서 벌인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암살 시도, 베이징에서의 일본 밀정 김달하 처단, 사전 검거로 끝난 수차례의 폭탄 반입, 이런 것들이 김원봉의 의열단이 1920년대 전반에 거행한 의거다. 의열단이 창설된 것은 1919년 11월9일 지린성 지린시 광화로(光化路) 57호에서였다. 당시 기록으로는 파호문 밖의 중국인 판(潘)씨의 집이라고 돼 있다. 의열단 창단 멤버인 이종암이 빌린 집이다. 이곳에서 폭발 실험도 했다니 비밀 아지트였던 셈이다. 지금은 당시 건물은 없고 중국농업은행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만 가면 큰 사거리가 나오는데, 대각선 건너편에 지린시 사법국과 법률지원 센터 등이 입주한 15층짜리 건물이 있다. 이곳은 당시 지린 감옥이 있던 자리다. 1927년 1월 말 지린에 와서 연설하던 안창호와 정의부 인사들이 중국 경찰에 체포돼 구금됐던 곳이다.

의열단은 1920년 초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김원봉은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했지만 자신의 거처를 단원에게조차 비밀에 부쳤다. 의열 투쟁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자 훗날 군대 창설을 염두에 두고 인재 양성에 나섰다. 1926년 의열단원 20여명을 인솔, 한꺼번에 황푸군관학교에 3기에 걸쳐 125명을 입교시켜 97명이 졸업했다. 1기생 가운데 한 명이 이육사다. 김원봉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중·일 사이에 전운이 짙어지자 독립운동의 좌우합작에 나섰다. 그 성과로 1935년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졌고 1938년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다.

우한에서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창설

 김원봉이 세운 군정학교 3기생들이 훈련을 받던 톈닝사.

김원봉이 세운 군정학교 3기생들이 훈련을 받던 톈닝사.

난징에는 지금은 폐사가 된 톈닝사(天宇寺)가 있다. 김원봉이 세운 군정학교 3기생들이 1935년 6개월간 교육훈련을 받던 곳이다. 만주 출신 졸업생은 대부분 만주로 돌아가 활동을 했고, 나머지는 1, 2기 졸업생 가운데 난징 잔류 인원과 합류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핵심이 됐다.

톈닝사는 중국 지도에서 바로 검색된다. 서탕녠이란 저수지 옆의 야산 중턱에 있다. 난징 지하철 1호선 룽?다다오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면 된다. 저수지 입구의 벽돌집 사이로 빠져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키 큰 나무 사이로 현판도 없는 톈닝사가 나온다. 내 블로그에 공개된 사진을 보고는 프리실라라고 하는 작가가 드로잉 작품으로 환생시켜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난징 시내에서는 1930년대 김원봉과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이 거주하던 곳을 찾아갈 수 있다. 화루강에 있는 후자화위안(胡家花園)이다. 후자화위안은 위위안이라고도 한다. 청말에 지어진 개인 원림인데 혼란한 시대가 오면서 한동안 빈민촌이 됐다. 지금은 고풍스러운 강남의 원림 주택으로 복원해 일반에게 개방(입장료 20위안)하고 있다.

중일전쟁에서 상하이에 이어 난징마저 일본군에 공격당하자 김원봉은 1937년 난징에서 창장을 거슬러 500㎞를 더 올라가면 있는 우한(武漢)으로 옮겨갔다. 김원봉은 이곳에서 총대장으로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독립투쟁 여정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곳은 지금의 후베이성 총공회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단체사진을 찍은 바로 그곳이다.

중국 국민당과 연합해 일본군과 전투

작가 프리실라가 톈닝사를 그린 작품.

작가 프리실라가 톈닝사를 그린 작품.

1938년 10월13일 우한에서 조선의용대 창설 경축행사가 열렸다. 지금의 우한시 리황포로(黎黃坡路)와 중산대로(中山大道)가 만나는 곳에 있는 기독교청년회(YMCA)에서다. 당시 2층에는 대연회장이 있었다. 지금은 상가건물이다. 리황포로는 1897년 러시아의 조계가 된 지역이다. 지금은 우한시 정부가 기독청년회 구지를 포함해 근현대사를 상기시켜주는 서구풍의 건물 16동을 묶어 리황포로 가두(街頭)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있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이후 국민당 6개 전구 13개 전지에 배속돼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조선인 투사들의 일본어 능력을 활용한 선전공작 등을 주로 담당했고 기습 전투에도 참여했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이 1940년 일본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국경 건너 소련으로 피신한 이후 일본군에 직접 무력으로 맞선 무장대오는 조선의용대뿐이었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 11월 충칭에서 연 확대간부회의에서 화북과 만주로 북상할 것을 결의했고, 조선의용대 주력은 1941년 봄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 지역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합류했다. 일본군과 치열하게 맞섰다. 1942년 7월에는 조선의용대라는 명칭을 조선의용군으로 바꾸면서 조직 운용이 질적으로도 개편됐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무정의 조선의용군으로 전환되어 간 것이다. 충칭의 본대에 남은 김원봉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북상하지 않고 국민당 지역에 남은 김원봉의 본대와 나머지 병력은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 이후 1942년 5월 충칭에서 광복군에 합편했다. 광복군 제1지대가 바로 조선의용대였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지대장으로 취임했다.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충칭으로 이동하자 임시정부도 김원봉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충칭에서 김원봉이 거주하던 집은 1940년대 모습은 없고 지금은 과일가게가 됐다. 우측 기둥에 주소가 부착돼 있다. 다포단정가(大佛段正街) 172호. 지금은 한 칸짜리 상가주택이다. 약방 간판은 있으나 과일을 파는 가게다.

김원봉은 중도좌파로 분류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가장 실용적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다. 정세 판단도 빨랐고 정확했으며, 기민하고 실행력도 돋보였다. 중국을 설득해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도록 하는 등 외교력도 뛰어났다. 그는 김구와 함께 조선 독립운동의 거물이자 기둥이었다.

지린성=윤태옥 < 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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