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틴 니퍼트. 엑스포츠 제공
더스틴 니퍼트. 엑스포츠 제공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투수 더스틴 니퍼트가 23일 연봉 210만달러(약 24억원)에 재계약 도장을 찍었다. 이전 연봉 120만달러(약 14억원)에 비해 75% 오른 금액이다. 예상을 웃도는 금액이라는 게 야구계 반응이다. 니퍼트의 지난 시즌 성적이 좋기도 했지만 그가 미국의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계약한 선수이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보라스는 협상을 끌며 선수의 몸값을 올리기로 유명하다. 박찬호, 류현진, 추신수 등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들도 그를 거쳐갔다.

대중에 각인된 에이전트는 선수에겐 대박을 안겨다주는 천사지만 구단 입장에선 까다로운 협상 파트너다. 머지않아 한국에서 보라스 같은 대형 에이전트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프로야구는 2017시즌이 끝난 뒤 정식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한다. 이미 시행 중인 프로축구와 더불어 '한국의 보라스'가 탄생할 토양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에이전트들은 보라스라는 수식어를 반가워하지만은 않는다. '대박'을 만드는 게 에이전트 업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선수의 삶 전반을 함께하는 동행자로서 에이전트를 봐주길 원한다. 한국의 에이전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사례를 중심으로 들어봤다.

◆ "보라스보다 일은 많이 할 걸요"

야구·축구선수들의 연봉계약과 이적이 이루어지는 겨울은 에이전트들이 가장 바쁜 계절이다. 연봉계약을 앞둔 선수에겐 금액 산정의 근거가 되는 자료를 준비해 줘야 하고 둥지를 옮기려는 선수에겐 새 구단을 알아봐 줘야 한다. 선수는 오로지 경기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에이전트의 역할이다.

비시즌 동안 선수의 용품 계약과 광고를 유치하기도 한다. 용품은 선수에게 직접 배달하는 경우도 있다. 일과 중에도 선수에게 전화가 오면 필요한 것을 구해다 준다. 심부름센터가 따로 없다. 사실상 경기를 제외하고 선수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에이전트의 업무인 셈이다. 담당하는 선수가 전국에 흩어져 있으면 활동 반경도 그만큼 넓어진다.

선수들이 에이전트를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이전트에게 통장을 맡기며 자산관리를 위임하는 경우도 있다. 선수와 에이전트 사이에 쌓인 신뢰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축구선수의 경우 은퇴 후에도 선수 시절 에이전트와 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설기현, 송종국, 이영표는 각자 대학 감독,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선수 시절 에이전트와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

남의 위해 살다 보니 에이전트 자신들의 삶은 없다. 이에 대해 한 에이전트는 "당신의 연봉계약을 누군가 대리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느냐"며 "믿을 만 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유승준 '아웃'시킨 청장과 담판도

믿을 만 하다는 인상은 주로 법 앞에서 더 강해진다.

축구선수 A는 군입대를 앞두고 무릎 연골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연골판을 3분의 2 이상 절제해 면제가 예상됐지만 신체검사에서 뜻밖에 3급 현역 판정을 받았다. 재심을 받았지만 같은 군의관이 똑같은 판정을 내렸다.

그러자 A의 에이전트가 나섰다. 재심신체검사에선 다른 군의관이 진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이전트는 ○○지방병무청을 직접 찾아가 이 같은 사실을 항의했다. ○○지방병무청장은 인기가수 유승준이 입국금지 될 당시 행정을 맡았던 것으로도 유명한 S씨였다.

원칙주의자이던 S씨는 에이전트가 절차의 문제를 꼬집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에이전트는 '소송으로 가면 이기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결국 A와 에이전트는 현역병입영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통해 면제 판결을 받아냈다. 병무청이 재판에서 진 건 15년 만의 일이었다.

배구선수 B는 자칫 외로울 수 있었던 싸움을 에이전트와 함께 했다. 임대선수 신분으로 해외에서 뛰던 B는 기간이 만료된 뒤 정식 이적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국 구단에서 이를 막았다. 임대기간은 계약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B는 배구규정에 대해선 무지했다.

그러자 B의 에이전트는 국제이적의 경우 국제배구연맹(FIVB) 규정이 국가별 규정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들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에이전트는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FIVB는 유권해석을 통해 B의 손을 들어줬다. 자유의 몸이 된 B는 자신의 종목에서 세계 최고 몸값을 받는 선수가 됐다. 에이전트 역시 한국 구단의 민형사 소송을 모두 이기며 기사회생했다. 이후 B의 에이전트는 작심한 듯 한국 최초로 FIVB 공인 에이전트가 됐다.

◆ 집 사주는 '집사'…출장이 휴가

소속 선수가 해외에 진출할 경우 에이전트는 더욱 바빠진다. 한국에선 시차를 무시하고 일해야 할 뿐 아니라 잦은 출장으로 공항을 제 집 드나들 듯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야구선수 C의 에이전트는 지난해 봄을 미국에서 살다시피 했다. MLB에 진출한 C가 스프링캠프 동안 머물 숙소를 구하는 것부터 시즌 동안 살게 될 집, 타고 다닐 차를 구하 것까지 모두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도 모든 걸 C의 취향에 맞춰야 했다. 시즌이 끝난 뒤 C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것도 에이전트의 몫이었다.

축구선수 D는 에이전트 덕에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해외구단과 계약한 그는 병역 혜택을 위해 대회 출전이 절실했다. 하지만 구단은 아시안게임이 국제축구연맹(FIFA)이 규정한 의무차출 대회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D의 에이전트는 구단주와 단장을 찾아가 한국 선수에게 병역이 어떤 제약을 가져오는지 하소연했다. 하지만 구단은 요지부동이었다. 에이전트가 1주일을 현지에 눌러살자 구단의 기류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결국 "감독이 승낙하면 협조하겠다"는 대답이 나왔다.

에이전트는 곧장 감독에게 달려가 장시간 설득했다. 아시안게임에 보내주지 않으면 D가 열심히 하겠느냐는 논리였다. 감독은 웃으며 합의서를 내밀었다. 조건은 간단하지만 분명했다. 'D가 선수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D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 병역 혜택을 받았고, 소속팀으로 돌아와서는 '감독의 양아들'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약속을 지킨 셈이다. D의 에이전트는 당시에 대해 "설득을 위해 눌러살던 1주일이 에이전트 생활 15년 만의 첫 휴가였다"고 회상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