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단식 선언'하며 야구 시작, 프로 입단은 투수로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해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왕으로
2002년 KS 동점 홈런,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일본전 홈런 등 역사적인 장면도
독보적인 홈런왕 이승엽, 그가 '국민타자'인 이유
이승엽(40·삼성 라이온즈)은 한국 야구의 역사다.

34인치 배트로 담 밖을 넘어가는 타구를 600개나 쳐냈다.

한국 선수 중 가장 많은 홈런을 친 뒤에도 이승엽은 또 하나의 타구를 담 밖으로 보내고자 고민하고, 노력했다.

화려한 과거를 잊고 오늘 땀을 흘려 '내일'을 준비했다.

치열했던 '오늘'은 곧 '빛나는 과거'가 됐고 한국 야구의 귀한 역사로 남았다.

◇ '소년' 이승엽의 단식 선언

"아버지, 저 밥 안 먹겠습니다"

이춘광 씨는 순둥이 막내아들의 단식 선언에 놀랐다.

'소년' 이승엽의 단식 선언은 한국 프로야구 홈런왕의 역사, 그 첫 페이지였다.

1986년 동덕초교에 다니던 이승엽은 4학년 때 대구시 멀리던지기 대회에서 3등을 했다.

중앙초교 신용석 야구부장이 이승엽에게 '접근'했다.

"너 야구하고 싶지?" 이승엽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네, 시켜주실 수 있나요?"

신 부장은 한 달 동안 이승엽의 집을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반대하고, 이승엽은 "야구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춘광 씨는 "그 시절만 해도 야구를 하면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며 "야구하다 실패하면 건달이 되지 않겠나.승엽이에게 '안 된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이승엽은 '단식 선언'까지 하며 고집을 피웠다.

신 부장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야구를 시켜보라"고 설득했다.

이춘광 씨는 "사흘 동안 고민을 하고 승엽이에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라고 물었다.

승엽이가 그 어린 나이에 진지하게 '후회하시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라"며 "그렇게 허락을 하니 바로 야구를 하러 뛰어가더라"고 회상했다.

◇ 이승엽의 꿈 "왼손 박철순이 될래요"

이승엽은 '왼손 박철순'을 꿈꿨다.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1982년) OB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끈 에이스 투수다.

이승엽은 경북고 2학년이던 1993년 청룡기대회에서 우수 투수상을 차지하고, 청소년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유망한 왼손 투수로 자랐다.

삼성도 처음에는 이승엽을 투수(고졸 우선지명)로 뽑았다.

이승엽도 "삼성 왼손 에이스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춘광 씨는 "승엽이가 '박철순 같은 투수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솔직히 속으로 웃었다"며 "박철순이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이승엽은 '왼손 박철순'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타자로 대성공했다.

이승엽은 1995년 삼성 입단과 동시에 왼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승엽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타자로 전향했다.

우용득 당시 삼성 감독은 "이승엽이 8월에야 공을 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 배팅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길래 박승호 타격코치와 상의했다"며 "전반기까지만 승엽이에게 타자를 시켜보자고 했다"고 떠올렸다.

이승엽은 "팔이 다 나으면 다시 투수를 하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그해 여름. 이승엽의 생각이 바뀌었다.

우용득 전 감독은 "팔이 다 나았을 때 '승엽아, 어떻게 할래'라고 물으니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타자 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앞서 이승엽은 경북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능점수가 모자라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가 만약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의 야구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

◇ '맹수' 이승엽, 홈런 기록 시작

'아기 사자' 이승엽은 곧 맹수가 됐다.

입단 3년 차인 1997년 97년 32홈런으로 최연소 홈런왕에 오르더니 1999년 54홈런으로 한국의 홈런 역사를 바꿔놨다.

54홈런은 당시 KBO리그 최다 홈런이었다.

4년 뒤인 2003년, 이승엽은 자신의 기록을 바꿔놨고 당시 아시아 신기록까지 세웠다.

이승엽은 2003년 홈런 56개를 쳤다.

이승엽이 54홈런을 넘긴 순간부터 삼성 경기가 열리는 날, 외야석에서 이승엽의 공을 잡으려는 야구 팬으로 가득 찼다.

팬들은 잠자리 채, 대형 글러브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승엽의 홈런공을 잡으려고 했다.

이승엽이 만든, 이색 풍경이었다.

사실 이승엽이 만든 더 짜릿한 장면은, 역시 홈런이었다.

이승엽은 한국과 일본프로야구 정규시즌 1군 경기에서 600홈런을 쳤다.

그러나 그가 '번외 경기'라고 표현하는 포스트시즌과 국제경기에서도 수없이 극적인 홈런을 날렸다.

이승엽은 한국 포스트시즌에서 64경기를 뛰며 14개의 홈런을 쳤다.

태극마크를 달고 나선 국제대회에서는 48경기 11홈런을 기록했다.

이승엽이 '평생 기억에 남을 홈런'으로 첫손에 꼽는 홈런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나왔다.

이승엽은 그해 11월 10일 대구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6-9로 뒤진 채 9회말 1사 1, 2루, 동점 3점포를 터트렸다.

이전 타석까지 20타수 2안타의 극심한 부진을 겪은 그는 이 홈런으로 응어리를 풀었고, 곧바로 나온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으로 삼성이 우승을 확정하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에서도 이승엽은 펑펑 울었다.

2-2 동점이던 8회말 1사 1루 이승엽은 일본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역전 결승 투런포를 쳐냈다.

이승엽은 경기 뒤 인터뷰 도중 눈물을 쏟아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이승엽은 "예선리그에서 너무 부진했다.일본과의 준결승에서도 삼진-병살타-삼진으로 세 타석을 보냈다"며 "정말 미칠 것 같았는데 절박한 순간에 홈런이 나왔다.그래서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포문이 열리자 거칠 것이 없었다.

이승엽은 다음날(8월23일)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1회초 결승 투런포를 쳐냈고, 한국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새로운 도전·힘겨운 일본 생활

이승엽에게도 힘겨운 시절이 있었다.

그는 도전했고, 때론 실패했고 상처도 받았다.

2004년 일본(지바롯데 마린스) 진출 첫해 이승엽은 큰 고비를 맞았다.

그는 지바 롯데 코치로 일하던 김성근 현 한화 이글스 감독에게 도움을 청했다.

"죽을 각오로 할 수 있나.'한국 홈런왕'의 자존심을 버릴 수 있는가."

김성근 감독의 물음에 이승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이승엽은 거의 매일 야간훈련을 했다.

2004년 14홈런에 그쳤던 그는 2005년 30홈런을 치고 이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요미우리에서도 이승엽은 승승장구했다.

2006년 41홈런, 108타점을 기록하며 일본 야구의 상징인 '요미우리 4번타자'로 올라섰다.

2007년에도 30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8년 부상이 겹치면서 45경기만 뛰며 8홈런에 그쳤다.

이승엽은 반등하지 못했고, 2011년 시즌을 마치고 국내 복귀를 택했다.

2012년 한국 무대로 돌아온 이승엽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혹평과 싸웠다.

이승엽은 "후배들에게 한참 뒤진 선수"라고 자신을 낮추면서도 매일 가장 먼저 그라운드에 나와 훈련을 했다.

◇ 우리가 이승엽을 사랑하는 이유

국내 복귀 후 이승엽이 밝힌 첫 각오는 "'과거의 스타'나 '상징'이란 말로 보호받을 생각은 없다.팀이 필요해서 라인업에 들어가는 선수가 되고 싶다"였다.

그의 목표대로, 이승엽은 삼성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됐다.

2012년 이승엽은 타율 0.307, 21홈런을 기록하며 정규시즌·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됐다.

2013년 0.253, 13홈런으로 주춤했지만 절치부심해 2014년 최고령 타율 3할·30홈런·100타점(0.308·32·101)도 달성했다.

이승엽이 전성기 시절에 근접한 성적을 올리면서 삼성 타선에 힘이 실렸다.

일본에서 뛰는 동안 잠시 멈췄던 KBO리그 개인 통산 기록도 작성했다.

이승엽은 지난해 KBO리그에 400홈런 시대를 열었고, 자신이 "팀에 필요한 선수의 기준"으로 꼽은 2천 안타 등을 차례대로 달성했다.

이승엽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이승엽은 팀 내 최고참이 된 후에도 가장 먼저 그라운드에 나와 개인 훈련을 했다.

슬럼프에 빠지면 해법을 찾고자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팀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자신의 기록보다 팀을 앞세웠다.

경기장 밖에서도 자신에게 엄격했다.

별다른 구설 없이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이춘광 씨는 "어린 시절 아들에게 회초리도 여러 번 들었다.칭찬보다는 혼을 낸 적이 많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아들이 정말 잘 자라줬다는 생각이 든다"며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얘길 이젠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야구팬들도 이승엽이 자랑스럽다.

(대구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jiks7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