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패럴림픽 첫 출전…1972년 대회때 첫 금메달
1988년 대회부터 2008년 대회까지 6회 연속 두자릿 수 금메달

제1회 패럴림픽은 1960년 로마에서 열렸다.

당시 23개국 40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초창기 패럴림픽은 올림픽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1968년엔 멕시코가 재정상 어려움으로 패럴림픽 개최를 포기했고 1980년엔 소련이 개최를 거부했다.

1984년엔 미국 뉴욕과 영국 스토크 멘더빌로 쪼개져 개최됐다.

한국도 패럴림픽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3회 대회인 1968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패럴림픽부터 참가했는데 당시 선수 6명, 임원 4명 등 총 10명의 소규모 선수단을 파견했다.

장애인 대표팀은 1972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 첫 메달을 획득해 종합 16위에 올랐다.

당시 탁구 휠체어 부문(TT1) 단식에 출전한 송신남은 한국 최초로 패럴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첫 금메달(레슬링 양정모)이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나왔으니, 패럴림픽 금메달 획득이 4년 빠른 셈이다.

송신남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축전을 받았고 김포공항부터 카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패럴림픽에 관한 관심은 많지 않았다.

1984년 대회에선 금메달을 단 한 개도 따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초반 1988 서울올림픽 유치에 나서면서 패럴림픽 유치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기도 했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의 전신인 장애인 스포츠기구(ICC)로부터 "왜 패럴림픽 유치 신청은 하지 않느냐"라는 공문을 받은 후에야 패럴림픽 유치를 인지하기도 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박종철 홍보부장은 "ICC의 공문을 받지 않았다면, 1988 패럴림픽은 호주가 유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유치가 확정된 뒤 패럴림픽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가대표 선수단은 4개월부터 합숙훈련을 했고, 정부에선 메달에 포상금을 내걸었다.

출전 선수단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1984년 대회엔 49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1988년 대회엔 366명이 출전했다.

박종철 부장은 "1988년 대회를 유치하면서 국민적인 관심이 많이 늘어났고, 장애인 체육의 저변이 비교적 넓어졌다"라며 "이전 대회에서 금메달을 한 개도 따지 못했던 장애인 대표팀 선수단이 4년 만에 40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40개 은메달 35개 동메달 19개로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종합 7위에 올랐다.

한국 장애인 대표팀 선수단은 1988년 대회 이후 꾸준히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이후 2008년 베이징 패럴림픽까지 6개 대회 연속 두 자릿수 금메달을 획득했다.

지난 2012년 런던 패럴림픽에선 금메달 9개 은메달 9개 동메달 9개를 거뒀다.

리우패럴림픽은 22개 종목에서 528개의 금메달이 달려있다.

306개 금메달이 걸려있는 올림픽보다 222개가 더 많다.

같은 종목 안에서도 장애등급에 따라서 경기가 나뉘기 때문이다.

종목은 올림픽과 비슷하다.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육상(177개)과 수영(152개)에 금메달이 많이 달려있다.

사이클(50개), 역도(20개), 휠체어 펜싱(14개)이 뒤를 잇고 있다.

5인제 축구, 7인제 축구, 좌식 배구, 휠체어 농구, 휠체어 럭비 등 장애인의 특성에 맞게 변형한 종목도 있다.

보치아는 올림픽에 없는 종목이다.

보치아는 표적구에 가까운 공의 점수를 합해 승패를 겨루는 경기로 중증 장애인만이 참가할 수 있다.

보치아는 1988년 서울패럴림픽대회에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뒤 2012년 런던 대회까지 7회 연속 금메달을 안겨줬다.

한국은 리우패럴림픽에 선수와 임원, 지원팀 등 총 164명의 선수단을 파견한다.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cyc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