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스타 이승훈(26·대한항공)이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또 한 차례 '기적의 레이스'에 도전한다.

4년 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이룬 화려한 업적 가운데서도 이승훈의 활약은 거의 예측할 수 없었던 만큼 가장 빛나는 성과로 꼽힌다.

당시 이승훈은 남자 5,000m에서 '깜짝' 은메달을 차지하더니 10,000m에서는 금메달까지 거머쥐었다.

특히 10,000m 결승에서는 당대 최강자인 스벤 크라머(네덜란드)의 결정적인 실격이 큰 변수가 됐지만, 12분58초55라는 올림픽 신기록(종전 12분58초92)까지 작성하는 '사건'을 냈다.

같은 대회에서 남녀 500m를 제패한 모태범(25·대한항공)과 이상화(25·서울시청)의 쾌거가 배기태, 김윤만, 이규혁 등으로 이어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 스프린터들의 기나긴 도전에 응답한 쾌거였다면, 이승훈의 성적은 불모지에서 꽃피운 기적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승훈 이전까지 한국은커녕 아시아를 통틀어도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의 시상대에 오른 선수는 없었다.

그만큼 장거리 종목은 체격이 좋고 다리가 길어 한 번 빙판을 지칠 때 멀리 뻗어갈 수 있는 유럽 선수들이 지배해 온 분야였다.

게다가 이승훈은 원래 쇼트트랙 선수로 올림픽 무대를 꿈꾸다가 선발전에서 탈락하자 직전 여름에야 뒤늦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 케이스이어서 '기적'이 더욱 돋보였다.

오히려 쇼트트랙 선수로 활약하면서 기른 탁월한 심폐지구력이 장거리 스피드스케이팅의 패러다임을 바꾼 원동력이 됐다.

올림픽 이후로도 이승훈은 월드컵 시리즈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8개, 동메달 7개를 따내며 간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소치에서 다시 한 번 밴쿠버의 신화를 쓸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4년 전 밴쿠버에서 이승훈에게 10,000m 왕좌를 내준 '장거리 황제' 스벤 크라머가 설욕을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크라머는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3개의 금메달을 따내고 올라운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007∼2012년 6연패를 달성한 당대 최고의 스케이터다.

올 시즌 출전한 모든 월드컵 레이스에서 정상에 오르며 물오른 실력을 과시한 크라머는 소치에서 1,500m와 5,000m, 10,000m, 팀추월에 출전해 4관왕을 노린다.

객관적인 실력에서 크라머에게 뒤진다는 것은 이승훈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소한 개인 종목에서 메달권에 드는 실력을 갖춘 만큼 변수가 많은 올림픽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크라머와의 대결은 별개로, 이승훈이 진짜 기적을 꿈꾸는 종목은 따로 있다.

세 명의 스케이터가 나란히 달리는 단체종목인 팀추월이다.

이승훈은 김철민(21·한국체대), 주형준(22·한국체대)과 함께 팀추월에 출전해 이 종목 사상 첫 메달을 노린다.

팀추월 대표팀은 마지막 월드컵 대회에서 네덜란드와의 격차를 좁히며 2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등 최근 상승세를 탔다.

흥미롭게도 김철민과 주형준 모두 이승훈처럼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 케이스다.

기본적으로 강인한 체력을 갖춘 데다 쇼트트랙 출신답게 여러 명이 함께 빙판을 지치는 레이스에 익숙하고, 그만큼 호흡도 잘 맞추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마지막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한 시점으로 기록을 따지는 팀추월은 한두 명의 에이스보다는 세 선수가 고르게 달리며 체력을 비축하도록 적절한 시기에 부드럽게 선두 주자를 바꿔주는 호흡이 중요하다.

풍부한 경험을 갖춘 이승훈이 레이스의 약 40% 비중을 차지하며 팀을 이끌고, 김철민과 주형준이 잘 따라가 준다면 충분히 메달을 노릴 만하다.

밴쿠버에서 장거리 빙속의 새 역사를 열어젖힌 이승훈이 소치에서도 팀추월 첫 메달의 '개척자'로 나서는 셈이다.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sncwoo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