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단 =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레슬링이 전례 없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한국은 지난 21일부터 25일까지 치러진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과 자유형 14체급 경기에서 끝내 금메달을 한 개도 건지지 못했다.

25일 저녁 열리는 동메달 결정전에 진출한 자유형 96㎏급의 김재강(23.성신양회)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은메달 3개와 동메달 5개가 이번 대회 남자 대표팀이 수확한 메달의 전부다.

한국 남자 레슬링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은 1982년 뉴델리 대회 이후 28년 만이다.

한국 레슬링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효자 종목'의 자존심을 되찾겠다고 굳은 결의를 다졌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노골드'에 그친 아픔을 밑거름 삼아 대표 선발 방식을 바꿨고, 세대교체를 단행하며 좋은 성적을 내고자 열심히 투자했다.

실제로 지난 7월 아시아선수권에서는 금메달 5개를 따내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야심 차게 출발한 아시안게임에서 참패하면서 다시 추락하고 말았다.

◇불운으로 시작된 부담감의 '연쇄 도미노'
첫날 경기를 하루 앞두고 진행된 대진 추첨에서 불운이 겹치면서 금메달 4개를 목표로 내걸었던 계획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메달 후보 0순위로 꼽히던 그레코로만형 55㎏급의 최규진(25.조폐공사)은 1회전에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인 하미드 수리안 레이한푸르(이란)를 만났고, 66㎏급의 김현우(22.경남대)도 2회전에서 어려운 상대인 하세가와 고헤이(일본)과 만나 나란히 패배하고 말았다.

특히 최규진의 상대였던 레이한푸르는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체력에 문제가 있어 후반에 만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으나 하필 첫 판에 맞붙었다.

첫날 금메달 2~3개를 따내 기분 좋게 출발한다는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선수들은 부담감에 몸이 굳어버렸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남자 선수 14명 중 절반인 7명이 국가대표로 뽑힌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선수들이다 보니 쏠리는 부담감을 제어하기 버거웠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이번엔 금메달이 나와야 한다'는 부담감도 커지면서 선수들의 자신감도 꺾여만 갔다.

경기장 구석에 마련된 대기실의 선수단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졌다.

그런 점에서 첫날 정지현(27.삼성생명)의 은메달이 특히 아쉬웠다.

정지현은 2002년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따낸 베테랑이지만, 깊었던 슬럼프를 이번에야말로 탈출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크다 보니 경기 전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후배들과 마찬가지로 부담감에 시달렸다.

결국 기대를 걸었던 정지현마저 은메달에 그치고는 어깨를 늘어뜨렸고, 첫날부터 기둥 선수가 의기소침해지면서 대표팀 전체 분위기도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전력 노출에 따른 '작전 실패'
그동안 재미를 봤던 '한국형 레슬링'의 작전도 철저히 분석당하면서 아시안게임에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대표팀은 그라운드 상황에서는 이란과 중앙아시아 등 체격 조건이 좋은 선수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 스탠딩 자세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상대를 괴롭혀 체력을 떨어뜨리는 작전을 '금빛 해법'으로 제시하고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왔다.

이러한 작전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단숨에 금메달 5개를 따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의 이런 작전을 눈여겨 본 경쟁국들은 스탠딩 자세에서 철저한 수비로 한국의 공격을 봉쇄했다.

1분30초가 지나면 파테르 자세로 승리를 다투는 그레코로만형에서 선수들은 초반 공격에 실패하고는 파테르에서 점수를 허용해 줄줄이 무너졌다.

스탠딩에서 공격에 치중하다 보니 파테르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레코로만형 55㎏급의 최규진은 1라운드에서 레이한푸르를 1-0으로 누르고 세트 스코어 1-0으로 앞서나갔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 최규진은 2라운드 1분30초를 득점 없이 비기면 파테르에서 공격권을 가질 수 있었으나, 무리하게 공격을 시도하다가 역습을 허용해 2라운드를 내줬고, 그대로 3라운드까지 빼앗겨 역전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사용했던 전력이 간파당하면서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철저히 전력을 숨기고 준비했던 일본과 대비돼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은 지난 8월 태릉선수촌에서 열린 한국과 평가전에서 단 두 체급을 제외하고 모두 패배했다.

하지만 아시아선수권대회와 평가전을 거치며 한국 등 경쟁국을 철저히 분석했고, 아시안게임에서 메달 텃밭인 여자 자유형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금메달 2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3개를 따내며 숨겨둔 실력을 뽐내고 있다.

◇세대교체는 '현재 진행형'
그러나 실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 광저우에 들어온 선수들은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내다보고 대한레슬링협회에서 공들여 키우고 있는 선수들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경기를 치르도록 유도해 체력을 길렀고, 여러 차례 대표선발전을 뛰어난 실력으로 통과한 재목들이다.

불운에 부담이 겹쳐 겪은 이번 실패는 더 큰 무대를 앞두고 선수들의 가슴을 더 단단하게 만들 '약'이 되어야 한다.

이미 이란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이 이끌고 있는 아시아 레슬링은 세계무대와 큰 수준 차가 없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아쉽게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상위에 올라간 선수들은 2년 뒤 런던에서도 충분히 도전해 볼만 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 더 다양한 기술을 다듬고 새로운 작전으로 준비한다면 여전히 희망은 찾을 수 있다.

국제심판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한 진형균(조폐공사) 감독은 "성적이 나빠 죄송하다.

런던으로 가는 단계라 생각하고 더 연구하고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광저우=연합뉴스) sncwoo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