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진해上)
그땐 그랬지…
'고요'를 배달합니다
365개로 이어지는 '1년 계단'을 밟으며 제황산공원을 오른다. 군함 마스트를 닮은 진해탑 9층 전망대에 서자 속천항과 대죽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눈을 돌리자 큰 빌딩이 없어 잔잔한 파랑(波浪) 같은 느낌이 드는 시가지가 펼쳐진다. 우리 겨레의 삶도 저렇게 잔잔했으면….

일제가 닦아놓은 방사선 도로가 시작되는 중원 로터리 근방,1912년에 지은 러시아풍 근대건축인 진해우체국(사적 291호)을 찾아간다. 현관 양쪽에는 한국은행 현관에서 본 투스칸 오더(tuscan order)식의 강한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하얀 벽체에 긴 아치형 창문,녹색 동판(銅版) 지붕이 잘 조화된 이 1층 목조건물엔 소박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감성 여행] 시간이 멈춘 곳! 더위도…적막도…느리게 걷는다



잔잔한 파랑 같은 아늑한 시가지

일제가 군수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부설한 경부선 · 경전선과 진해항을 잇는 진해선에 지었던 7개 역사 가운데 하나인 진해역사(등록문화재 제192호)로 간다. 대합실 출입구 위의 삼각형 마감장식인 박공지붕과 선문답을 나눈다. "머리에 액센트 좀 줬는데 어때요?" "개념 없는 소린 그만하고 아스팔트싱글을 깐 지붕 때문에 서양 건물처럼 돼버린 네 주제 파악이나 좀 하거라."

옛 웅천현 지역인 웅동으로 간다. 웅동1동 자치센터 앞에는 30여개 난전이 펼쳐져 있다. 아마도 오늘이 마천 장날인가 보다. 한때는 이웃한 부산 성산장,웅천장에 버금갈 만큼 큰 5일장이었다는데 지금은 코딱지만하다.

나도 어렸을 적엔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달걀 두어 꾸러미 손에 들고 30~40리 고갯길을 넘어 광주 서방장에 내다 팔던 어린 장꾼이었다. 그 시절의 5일장은 안부를 주고받는 사교장인 동시에 당면한 현안에 대해 기탄없이 의견을 표출하던 언론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5일장은 세월 저 너머로 담배연기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


[감성 여행] 시간이 멈춘 곳! 더위도…적막도…느리게 걷는다

마음이 더러우면 모래를 삶아 밥을 만들라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을 밀치자 김달진 시인의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2004년에 복원한 생가는 헛간채 · 곳간채 · 행랑채 · 사랑채 · 안채 등을 두루 갖춘 규모가 큰 집이다. 대숲 아래엔 장독대가 가지런히 놓였고,텃밭엔 들깨 등 채소가 심어져 있으며 감나무와 칠엽수가 터줏대감처럼 뒤뜰을 지키고 있었다.
맞은 편 김달진문학관으로 들어서자 시인의 흉상이 반가이 나그네를 맞는다. 장군도 아닌데 좌대는 왜 그리 높은가! 시인의 연보와 시,붓글씨 등이 망라된 문학관을 둘러본다. 1929년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 김달진 시인(1907~1989)은 첫시집 《청시》,시 전집 《올빼미의 노래》 등 시집과 많은 역해서를 남겼다.

정신주의 시세계를 추구했던 시인은 승려,한학자,교사 등 3색(色)의 일생을 살다 갔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라는 시집을 샀다. '마음이 더러우면/ 모래를 삶아 밥을 만들라.// 모래밥을 먹고/ 그 마음 씻어버리라'(시 '모래밥').어쩌면 김달진 시인은 자신이 역해한 《한산시》의 저자 한산자의 후생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학관 골목엔 눈요깃거리가 많다. 옆 골목엔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재현한 웅천막사발 복원전시장이 있다. 또 앞 골목엔 '부산 라듸오''예술사진관''태양 카라멜''평양민족음악원''추억의 장난감' 등 마치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거리가 조성돼 있다.

건물 안에는 라디오 · 카메라 · 시계 · 축음기 · 전화기 · 낡은 LP판 등 온갖 고물들이 쌓여 있다. 세월에 역주행하는 옛거리를 조성한 사람은 김현철이라는 분이다. 그가 운영하는 카페 '김씨공작소'에 들어가 잠시 얘기를 나눴다. 그는 15년 동안 전국을 돌며 모았다는 이 잡동사니들을 활용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구상 중이다. 그의 관심은 '근대'에 집중돼 있다.

마을을 빠져나오려는 찰나,대나무를 이어 붙인 특이한 담장이 내 눈길을 낚는다. 박배덕이라는 화가가 폐가에 꾸민 '마당'이라는 갤러리다. 김현철씨 등이 소사동에서 구현하려는 작업들은 과연 '속물성(kitsch)'이 아닌 당당한 예술작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뜬 세상 누더기 따윈 다 버리고

굴암산(662m) 자락 성흥사로 발길을 서두른다.

주차장 위 부도밭에는 조선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부도 8기가 있다. 보주가 예리하게 잘려나간 부도,깨진 옥개석을 아무렇게나 얹어놓은 부도….어떤 생은 죽어서까지 저렇게 고난을 겪게 되니 적멸이란 얼마나 머나먼 것인가.

일주문 역할을 하는 성흥1교를 건넌다. 다리는 내게 '뜬 세상 누더기 따윈 다 버리고 맨몸 하나로 건너오라'고 속삭인다. 계곡엔 '환경보전'을 위한 행락객들의 물놀이가 한창이다. '불모산성흥사'라는 현판이 걸린 천왕문을 들어서자 맞배지붕 건축인 대웅전이 나그네를 맞는다. 성흥사는 신라 흥덕왕 8년(833)에 무염국사가 웅동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데 대한 보답으로 왕이 재물과 토지를 하사하여 짓게 된 절이라고 전한다. 성주산문의 개조인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들의 이름에는 '성'자가 들어간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엔 키 큰 코코스야자수 두 그루가 외호신장처럼 서 있다. 정면 3칸 · 측면 3칸의 아담한 대웅전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무염국사 진영이 봉안돼 있다. 후끈 달아오른 한낮의 지열이 절집을 휩싼다. 아무리 부처라 할지라도 오늘 같은 찜통더위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설하진 못할 터.어쩌면 삼존불들도 결가부좌를 풀고 저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중생과 더불어 탁족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감성 여행] 시간이 멈춘 곳! 더위도…적막도…느리게 걷는다

'성흥사 한낮,마당가 고요 몇 포기 자라고 있다. 불모산 자락 갖은 풀벌레 소리 먹고 자란 이 싱싱한 무공해 채소를 소음 과다복용으로 시들어 가는 그대에게 긴급 배송하고 싶다. '

이윽고 무허가 시인은 짝퉁 시에 '꿈꾸는 택배'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런데 적막의 무게는 어찌 혜량할 것이며 택배요금은 어떻게 계산한다?

안병기 여행작가


◆찾아가는 길

서울→경부고속도로→대전IC→대전통영간고속도로→진주IC→남해고속도로→동마산IC→2번 국도→진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어린이 체험교육에 딱이네


◆맛집

'산 자(者)들이여,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놓이는 수저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는가'(이기철 시 '밥상' 부분). 때로는 아름다운 것과 고마운 것이 혼동될 때가 있다. 아름다워서 고마운 것도 있고 고마워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수저 놓는 소리는 어머니처럼 고마워서 아름다운 것에 속할 것이다.

진해시 석동 진해경찰서 후문에 있는 산채한정식(055-543-7966).이 집의 유일한 메뉴는 한 그릇에 6000원 하는 산채한정식이다. 두부,버섯무침,고사리 무침,불고기,조기 등 10여 가지 반찬이 곁들여져 나온다.

◆여행 팁

앵곡동 해군사관학교 안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은 이충무공실,해군해양실,해사실 등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이충무공실에는 충무공 후손들이 기록한 공의 행장,초상화,각종 문헌 등이 전시돼 있으며 해군해양실에는 신안해저에서 인양한 중국 원나라 청자,조선시대의 무기·지도 등이 있다. 특히 유통식(有筒式) 화기인 중완구(보물 제859호),현자총통 등 귀중한 역사유물을 볼 수 있다.

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 만한 곳은 야외전시장이다. 이곳엔 실물 크기로 '복원'한 거북선,조선시대의 대포·옛 닻,최근에 퇴역한 해군 대잠항공기 등이 전시돼 있다. 관람하려면 해군사관학교 홈페이지(www.navy.ac.kr)에 접속한 후 '방문 및 견학' 메뉴를 누른 후 견학 절차를 밟아야 한다. 관람료는 받지 않는다. 휴관:1월1일,설·추석 연휴,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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