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기적의 연속'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종목에 혜성같이 등장, 연거푸 한국 신기록을 갈아 치우더니 급기야 동계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쇼트트랙에서 전향한 이승훈이 천운을 앞세워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기적 시리즈'를 또 한 번 연출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은 물론 선수 본인과 코칭스태프까지 모두 놀라버린 기적의 레이스였다.

24일(한국시간)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

남자 1만m 경기를 지켜보려고 경기장을 가득 채운 네덜란드 '오렌지 군단' 응원단들은 한순간 할 말을 잊었다.

네덜란드 스피드스케이팅의 자랑인 스벤 크라머가 12분54초50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자 모두 기립 박수를 보냈지만 잠시 후 장내 아나운서가 크라머의 실격을 알리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날 관중의 동요는 이승훈의 경기 때부터 이어졌다.

5조에서 경기를 치른 이승훈의 상대는 네덜란드의 장거리 신예인 아르옌 판 데 키에프트.

아르옌은 취재진에 배포된 선수 프로필 자료에도 별다른 내용이 없을 정도로 미지의 선수였고, 이승훈은 아르엔을 의식하지 않고 레이스를 펼쳤다.

초반 레이스부터 천천히 기록을 줄여나간 이승훈은 5,200m를 넘어서면서 6분44초25를 기록했다.

순간 장내 아나운서는 "이승훈이 올림픽 신기록 페이스로 레이스를 펼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을 했고, 관중석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장내 아나운서는 이승훈이 매 바퀴를 돌 때마다 '올림픽 신기록 페이스'를 언급했고, 네덜란드 응원단들은 자기 나라 선수가 함께 뛰고 있는데도 이승훈이 응원석 앞을 지날 때마다 큰 함성으로 독려했다.

마침내 길고 긴 레이스가 끝나고 이승훈이 12분58초55의 올림픽 신기록과 더불어 네덜란드 선수를 반 바퀴 추월한 채 결승선을 통과하자 모든 관중이 기립 박수를 보내며 '아시아 영웅'에게 찬사를 보냈다.

숨 막히는 마지막 조의 경기.

장거리 '절대강자' 크라머는 역시 강했다.

초반 레이스를 신중하게 펼치며 이승훈과 기록을 줄여나간 크라머는 엄청난 스피드로 2,400m부터 이승훈을 0.15초 앞섰다.

이후부터 계속 이승훈과 기록을 줄이던 크라머는 막판 8,000m 지점부터 이승훈과 6초 이상 차이를 벌렸다.

이 대로라면 크라머의 금메달과 이승훈의 은메달이 확실한 순간이었다.

이때 말 그대로 기적이 연출됐다.

갑자기 경기장 전광판에서 크라머가 코스를 바꾸는 장면을 연속해서 보여줬다.

관중석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벤치에서 크라머의 경기를 지켜보던 이승훈과 김관규 감독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크라머의 실격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크라머도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코스를 잘못 바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네덜란드 코칭스태프 역시 울상을 짓고 말았다.

마침내 전광판의 이승훈 이름 옆에 우승을 알리는 '1'이 쓰였고, 이승훈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링크 주변을 돌았다.

크라머의 실격으로 말을 잊었던 네덜란드 응원단도 '아시아 챔피언'에게 큰 박수를 보내줬다.

현장을 지켜본 외신 기자들도 단거리 종목을 모두 휩쓸고 유럽의 자존심인 장거리 종목마저 한국의 메달 기적이 연달아 이어지자 "대단한 기록이다. 놀랍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밴쿠버연합뉴스) 이영호 기자 horn9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