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서 스피드스케이팅 전환…7개월만에 '밴쿠버 이변'
스포츠가 재미있는 건 절대 강자가 없는 데다 예고 없이 이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색깔은 은메달이지만 금메달 못지않은 쾌거를 이룬 스피드스케이팅 5000m의 이승훈(22 · 한국체대 )은 올림픽 개막 초반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다.

그는 불과 7개월 전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 전환'해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 풍운아다. 동양인 처음으로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에서 메달을 따 국내는 물론 아시아 빙상팬들의 영웅이 됐지만 "쇼트트랙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며 속내를 감추지 않는 신세대다.

초등학교 시절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빙상과 인연을 맺은 이승훈은 중학교 때부터 주니어와 시니어 대표팀을 거치면서 쇼트트랙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대표팀 막내로 출전한 2005년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1500m와 3000m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세대교체의 선봉장으로 떠올랐다.

2009년 2월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는 1000m와 1500m,3000m에서 금메달을 수확하며 3관왕에 올랐다. 잘 나가던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지난해 4월 쇼트트랙 대표선발전.밴쿠버 동계올림픽 티켓이 걸린 선발전에서 탈락,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하고 나서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며 "'난 원래 안 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에 좌절도 했었다"고 털어놨다.

이승훈은 고심끝에 스피드스케이터로의 변신을 선택했다. 단거리 종목(쇼트트랙)에 필요한 순발력과 파워가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승훈은 쇼트트랙을 통해 단련된 지구력을 앞세워 장거리 종목에 '올인'키로 결정한 것.그가 다시 스피드스케이트 부츠를 신은 것은 지난해 7월.그나마 다른 사람의 스케이트화를 빌려서 탔다.

하지만 그는 "처음치고는 편했다. 마치 오랫동안 해왔던 느낌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동안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 선수가 몇 명 있었지만 초반 '반짝 성적'을 내다가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어차피 해도 안된다'는 주변의 시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대로 앞만 보고 달렸다.

이승훈은 지난해 10월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선발전에서 국가대표 최근원(의정부시청)을 앞지르고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눈부신 신기록 행진을 이어갔다. 지난해 11월 월드컵 1차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데 이어 같은 달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5000m에서 6분25초03을 기록,4년 묵은 한국기록(6분28초49)을 3초46이나 앞당겼다.

지난해 12월 초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월드컵 4차 대회에서는 6분16초75로 결승선을 통과해 자신이 세운 한국 기록을 20여일 만에 8초 이상 단축했다. 12월 중순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개최된 5차 대회에서는 6분14초67로 레이스를 마쳐 또 다시 한국 기록을 갈아치웠다. 한 달 사이에 한국 기록을 무려 13초82나 단축시킨 이승훈은 월드컵 5개 대회 연속 10위권 내에 들었다.

마침내 동계올림픽 무대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역대 세 번째 메달리스트로 우뚝 서게 됐다. 말 그대로 '빌린 스케이트화 기적'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승훈은 경기 직후 "부모님과 통화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니'라며 너무 기뻐하셨다"며 "여자 친구도 '너 원래 그런 사람이었니'라고 칭찬해줬다"며 웃음을 지었다.

이승훈이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리스트가 됐지만 쇼트트랙과의 깊은 정을 쉽게 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쇼트트랙은 아직 욕심이 나요. 캐나다에 오기 전 쇼트트랙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기회가 되면 쇼트트랙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