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대표팀을 따라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26일 제15회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의 한정호 트레이너는 "황당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16호 태풍 '켓사나'의 영향으로 대회가 열리는 필리핀 마닐라 전역에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져 이날 경기가 모두 취소됐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경기가 열리는 니노이아퀴노 스타디움 앞까지 도착한 선수들은 어른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차오른 주변 거리를 망연히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대표팀 차상현 감독대행은 "실내경기를 비 때문에 못한다니 말이 되느냐. 한국 같았으면 태풍이 오든 홍수가 나든 경기를 했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자연현상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배구경기 우천 취소'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어설프게 대회를 운영해 온 조직위원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회 조직위는 바로 전날까지도 준비가 부족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메인 경기장인 니노이아퀴노 스타디움은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을 하기 위해 찾아온 25일 오전에도 경기장 내벽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게다가 경기장 바닥도 마감이 엉성해 곳곳에 붕 뜬 부분이 눈에 띄었다.

대표팀 관계자들이 "저런 곳에 선수들 발이 잘못 걸리기라도 하면 바로 부상으로 연결될 것"이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준비되지 않은 경기장은 예기치 못한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말았다.

조직위는 "비 때문에 경기장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취소 이유를 밝혔다.

메인 경기장이 이 지경이니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24일 찾아간 보조 경기장에는 네트도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았고, 천장이 낮아 공이 조금만 높이 튀어오르면 전등에 닿을 지경이었다.

대표팀 주장을 맡은 여오현은 "이런 곳에서는 경기 못한다"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여기에 식사가 제때 나오지 않아 선수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버스가 도착하지 않아 30분 넘게 기다리는 등 허점투성이였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경기를 제대로 치를 수 있느냐다.

현지 기상청에 따르면 태풍은 북동쪽 230㎞ 떨어진 곳에서 마닐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비가 내릴 가능성이 높다.

대회 일정에는 휴식일이 하루밖에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또 경기를 못하게 될 경우 일정 자체를 완전히 새로 짜야 할 판이다.

필리핀 배구협회는 "무조건 계획된 일정 안에 대회를 끝마치겠다"는 입장이라 역시 사상 유례없는 '더블헤더 배구경기'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안 그래도 고된 일정과 불미스런 사건을 겪으며 선수들의 심신이 지쳐 있는 상황이라 대표팀으로서는 더욱 큰 부담을 안게 될 전망이다.

실제로 전날 몰디브와 경기를 앞두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경기를 보여주자"며 전의를 불태웠던 선수들은 또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하나같이 "별의 별일을 다 겪는다"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은 경기 계획은 26일 밤 끝나는 아시아배구연맹(AVC) 총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마닐라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sncwoo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