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한국시간) 막을 내린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육상은 냉엄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한 발짝 나아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제자리에 머물거나 도리어 뒤로 걷는 현주소만 재확인했다.

2011년 대구에서 차기 대회를 개최하는 나라로서 강렬한 인상을 전 세계에 남길 필요가 있었으나 최악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고 육상 후진국의 굴레를 벗지 못해 총체적 실패로 규정지을 만하다.

일본이 남자 마라톤 단체전에서 3위에 오르고 남자 400m 계주에서 4위를 차지하는 등 상징적인 종목에서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웠고 중국도 은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로 선전한 것에 비춰보면 더욱 초라하다.

1983년 초대 세계선수권대회부터 선수를 파견해 온 한국은 이번 대회에 남녀 총 19명으로 역대 최대 선수단을 내보냈다.

그러나 트랙과 필드에서 단 한 명도 결선에 진출하지 못했고 기대를 걸었던 마라톤과 경보에서는 모두 중하위권에 머물면서 실망감만 안겼다.

한국신기록도 나오지 않았다.

2007년 오사카 세계대회에서는 김덕현(광주광역시청)이 세단뛰기에서 결선에 올라 1999년 세비야 대회 때 남자 높이뛰기에서 6위에 오른 이진택 이후 8년 만에 결선 진출자를 배출했고 남자 마라톤은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내는 등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남자 110m 허들의 이정준(안양시청)이 최초로 1회전을 통과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올해에는 전 부분에서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동안 2005년 이후 각종 국제대회에서 단 한 번도 바를 넘지 못했던 남자 장대높이뛰기에서 김유석(서울시청)이 징크스를 깼고 랜들 헌팅턴 코치의 집중지도로 기록이 향상 중인 정순옥(안동시청)이 여자 멀리뛰기에서 4㎝ 차로 아깝게 탈락하는 등 작은 성과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그늘이 너무 짙었다.

2011년 대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한 '중간 과정'이라고 하나 성공을 가늠해볼 만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지 못해 대한육상경기연맹은 물론 대구 조직위원회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잇따른 부상과 컨디션 난조
세계선수권대회는 운동선수라면 한 번쯤 밟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다.

기준기록을 통과해야 출전자격을 얻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룰 수 있는, 결코 녹록지 않은 대회다.

하지만 대표 선수들은 이런저런 부상과 컨디션 조율 실패로 어렵게 잡은 기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남자 세단뛰기에 이어 멀리뛰기에서 3㎝가 부족해 예선에서 탈락한 김덕현은 "무릎이 아파 한 달 이상 훈련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남자 110m 허들의 이정준과 박태경(경찰대) 역시 허벅지 근육통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답했다.

여자 장대높이뛰기에 나선 임은지(부산 연제구청) 역시 발목이 통통 부을 정도로 정상이 아니었다.

남자 경보 20㎞에서 34위에 머문 김현섭(삼성전자)은 "지난달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한 뒤 몸이 피곤했다"고 밝혔다.

남자 창던지기에서 50㎝ 차로 아쉽게 결선에 오르지 못한 박재명(대구시청)만이 "열심히 훈련했고 컨디션도 좋았는데 아쉽다"고 말했을 뿐 크고 작은 부상에 기대주들은 발목이 잡혔다.

에이스 지영준(경찰대)이 발바닥 물집 부상으로 중도 기권한 남자 마라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국가의 명예가 달린 세계선수권대회보다 소속팀의 자존심을 위해 뛰는 전국체전에 초점을 맞춰 훈련하다 보니 성적과 기록이 좋을 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맹의 안일한 목표 설정과 허술한 대회 준비도 한국 육상의 퇴보를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팀 차원에서 이번 일을 계기로 선수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2011년 대구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에게도 책임감을 더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연맹 폭풍 전야..시스템 대수술
지난 1월 연맹 회장에 취임해 처음 치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육상의 '기막힌 광경'을 생생히 목격한 오동진 회장은 귀국 후 현재 시스템에 개혁의 칼을 들이밀겠다고 선언했다.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연맹 집행부 임원 중 일부를 물갈이할 수 있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오 회장의 개혁 방안은 지도자 자질을 끌어올리고 만연한 패배주의를 척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먼저 미국에서 전권을 행사할 외국인 총감독과 장대높이뛰기 등을 책임질 도약 코치를 데려올 전망.
2011년까지 수준급 외국인 지도자를 계속 늘려 '히딩크 프로젝트'로 단기 성과를 노리고 장기적으로는 젊고 유능한 국내 코치들을 미국으로 보내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지도자 양성 시스템을 새로 구축할 예정이다.

오 회장은 현재처럼 패배를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에서는 절대 육상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 지원 등에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경우 1억원을 주는 경기력 향상금을 대폭 인상, 화끈한 당근으로 선수들의 동기를 자극하는 방법도 생각 중이다.

한편 전략 종목도 새로 개편될 것으로 관측된다.

연맹은 2011년 대구 대회에서 결선 진출을 노려볼만한 종목으로 경보, 도약종목, 장대높이뛰기, 허들 등을 찍고 투자를 해왔으나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종목으로 선회할 가능성도 있다.

연맹 관계자는 24일 "'틈새 종목'으로 꼽은 종목 선수들에게 계속 지원하되 성적이 그대로라면 지원액 등을 줄여 다른 종목에 투자할 수도 있다.

새 종목에는 남자 400m 계주 등이 꼽힌다"고 설명했다.

(베를린연합뉴스) 장현구 기자 cany9900@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