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장례식은 아니잖나"…미소 남기고 떠난 왓슨
20일 새벽(한국시간) 스코틀랜드 턴베리GC 에일사코스 18번홀(파4) 그린.스탠드를 메운 갤러리들이 모두 일어서 걸어 들어오는 한 노장 골퍼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주인공은 톰 왓슨(60 · 미국).왓슨의 두 번째 샷이 그린을 살짝 넘어갔지만,파만 하면 '메이저대회 최고령 챔피언'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왓슨은 그러나 갤러리들의 열망과는 달리 보기로 홀아웃하고 승부를 연장전으로 넘겼다.

그 한 시간 후.18번홀 주변 갤러리들은 다시 한번 왓슨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번에는 축하의 박수가 아니었다. 나흘 동안 276회의 샷을 흠 잡을 데 없이 하고도 마지막 두 번의 샷을 실수해 2위에 그친 데 대한 위로의 박수였다. 노장은 슬픔이 밴 듯한 미소로 갤러리들의 환호에 답했다.

제138회 브리티시오픈에서 정규라운드 72홀 내내 주연이었으면서도 '클라레 저그'(우승 트로피)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왓슨의 '노장 투혼'은 이렇게 골프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가 나흘 동안 보여준 관록의 샷은 메이저대회 최고령 챔피언 못지않은 성취이자 관심이었다.

32년 전 이곳에서 열린 대회를 포함,브리티시오픈 5회 우승 경력의 그였지만 최고령 출전 선수인 왓슨에게 관심을 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이도 그렇지만 9개월 전 엉덩이 수술을 받은 데다 세계랭킹은 1374위였으니 타이거 우즈,파드리그 해링턴,어니 엘스 등 내로라하는 선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왓슨은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초반부터 관록 샷을 내뿜었다. 까다로운 코스 셋업과 세찬 바람 속에서도 페어웨이를 놓치지 않는 정교한 티샷,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퍼트는 아들뻘인 젊은 선수들을 부끄럽게 할 정도였다. 샷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의 얼굴엔 항상 온화한 미소가 있었다. 우즈가 게임이 안 풀릴 때 클럽을 내동댕이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첫날 공동 2위,둘째날 공동 1위,셋째날 단독 1위.그리고 운명의 최종라운드.17번홀(파5)에서 버디를 잡고 1타차 선두로 마지막홀에 다다랐다. 티샷은 페어웨이에 안착했고,두 번째 샷은 쇼트 아이언 거리.잠시 망설인 끝에 8번아이언으로 친 볼이 그린에 떨어지더니 그린을 넘어 프린지와 러프 경계선에 멈췄다.

'쇼트게임 고수'인 그에게 파는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퍼터로 친 볼은 홀을 2.4m나 지나쳐버렸고 파퍼트마저 홀 오른쪽으로 흐르며 승부를 연장으로 넘기고 말았다. 파만 잡아도 '턴베리의 전설'을 쓸 수 있는 순간에 그답지 않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한 것이 결국 패인이 되고 말았다. 왓슨은 "9번을 잡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했지만,이미 늦었다.

"이게 장례식은 아니잖나"…미소 남기고 떠난 왓슨
'4홀'을 치르는 브리티시오픈 연장 방식은 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 스튜어트 싱크(36 · 미국)는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고 상승세를 타고 있는 젊은이가 아닌가. 왓슨이 브리티시오픈에서 첫 우승한 1975년 싱크는 겨우 두 살이었다. 잭 니클로스는 "왓슨이 72번째 홀에서 정신적으로 이미 바닥난 상태가 됐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5,6,17,18번홀에서 치러진 연장전에서 왓슨은 4오버파,싱크는 2언더파로 6타차 완패였다. 통산 미국PGA투어 39승,챔피언스(시니어)투어 12승의 그였지만,거기까지가 한계였다. 1996년 마스터스 최종일 6타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닉 팔도에게 역전패한 그레그 노먼을 연상시켰다. 왓슨은 연장 세번째 홀인 17번홀(파5)에서 티샷을 러프에 빠뜨린 것에 대해 "그때 내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장의 눈가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한 기자가 이 대회를 요약해달라고 하자 그는 "한 노장이 위업을 이룰 뻔했다(The old fogey almost did it.)"고 귀띔해주기까지 했다. 또 안타까워하는 취재진과 갤러리들에게 "이것이 장례식이 아니잖아요?"라고 반문하며 나흘 동안 76홀 격전을 벌였던 에일사코스를 떠났다. 많은 중 · 장년 골퍼들에게 희망을 남긴 채.

김경수 기자 ksm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