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뒤 골프 입문 '세리 키즈'

'무명' 박인비(20)가 여자 골프 메이저대회 중 최고 권위를 지닌 2008 US여자오픈에서 생애 첫 승을 올렸다.

박인비는 30일(한국시간) 미국 미네소타주 에디나의 인터라켄CC(파73)에서 끝난 대회에서 4라운드 합계 9언더파 283타를 기록,스웨덴의 헬렌 알프레드손을 4타 차로 제치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박인비가 골프채를 잡은 것은 지금부터 10년 전인 10세 때다.

1998년 7월7일 치러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91홀 혈투 끝에 우승하는 순간을 TV로 보고 딱 이틀 후 골프에 입문한 '박세리 키즈(kids)'다. 물론 아버지 건규씨(46)의 권유가 있었지만 커다란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던 박세리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가 새벽 3시부터 US여자오픈 TV 중계를 보고 계셔서 나도 반쯤은 자면서 같이 TV를 봤어요.

박세리 선배가 마지막 퍼트를 집어넣자 함성을 질러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골프 연습장을 다니던 박인비는 분당 서현초등학교 때 각종 주니어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고 2000년 겨울 처음 창설된 국가 대표 상비군에 뽑히며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

죽전중학교로 진학한 뒤 제주도지사배 주니어 선수권대회 중등부에서 우승한 박인비는 학업과 골프를 병행할 수 있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만 한국에 남고 어머니 김성자씨(45)와 함께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화려한 주니어 시절을 보냈다.

다섯 차례나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대표 선수로 뽑혔고 2002년에는 미국 주니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그 해 AJG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박인비는 네바다 대학(UNLV)에 입학했으나 골프와 공부를 병행하기 힘들어 한 학기도 못 마치고 중퇴,2006년 4월 프로 전향을 선언했다.

그 해 퓨처스투어(2부 투어)에서 상금 랭킹 3위를 한 덕분에 미국 LPGA투어 시드를 받았다.

하지만 투어 데뷔 후에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이 대회 전까지 여덟 개 대회 연속 커트 탈락하면서 골프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다행히 2007 US여자오픈에서 공동 4위를 한 것을 전환점으로 자신감을 찾기 시작했다.

올 들어 이 대회 전까지 다섯 차례나 톱10에 들며 우승을 노렸고 마침내 프로 첫 승을 최고 권위 대회에서 거뒀다.

박인비는 아직 스폰서가 없어 전면에 'LPGA'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다닌다.

유일한 취미는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퍼트와 벙커 샷에 자신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이 강점이다.

동갑내기인 교포 안젤라 박,오지영,김인경 등과 친하게 지낸다.

지난주 웨그먼스 LPGA대회 때는 마지막 날 18번 홀에서 친 드라이버 샷이 여성 갤러리를 맞혀 이가 두 개 부러지는 사고도 있었다.

김성자씨는 "병원에 찾아간 것은 물론이고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면 깃발에 사인을 해서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며 "그 사건이 이번 대회 우승의 액땜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에디나(미 미네소타주)=김경수 기자 ksm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