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이었다.

향후 5년간 미국 LPGA투어 출전권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지난 1일 US오픈 최종 라운드가 열린 노스캐롤라이나주 서던파인스의 파인니들스GC.15번홀 그린에 선 신지애가 퍼터를 볼에 정렬시키려는 순간 갑자기 몸이 퍼터쪽으로 기울었다.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한 몸이 그 짧은 순간에 저절로 퍼터쪽으로 쏠린 것이다.

골프를 시작한 이후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신지애는 평소 같으면 홀 속으로 쏙쏙 집어넣었을 거리에서 여러번 퍼팅을 실수한 끝에 6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 "밥 좀 먹고요"

지난해 KLPGA 무대에서 5관왕(대상 신인상 상금왕 다승왕 최저타수상)을 차지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신지애.올해 국내에서 열린 KLPGA투어 9개 대회에서 벌써 4승을 달성,상금랭킹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그의 필드는 더 이상 국내에만 있지 않다.

'향후 10년간 세계 여자골프 무대에서 박세리의 뒤를 이을 선수는 누구인가'라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신지애를 꼽는다.

3일 오후 미국에서 돌아온 신지애는 시차 적응도 못한 상태로 다음날 열린 국내 대회에 출전했다.

'너무 욕심부리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법 했다.

인터뷰 시간을 잡기 위해 5일 전화를 걸었다.

쉬지도 못한 데다 대회 중에 장시간 인터뷰에 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매니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잠깐만요,옆에 있는데 물어볼게요….여보세요 내일 오후 3시에 오시라는데요." 다음날 약속 시간에 맞춰 용인 코리아CC를 찾았지만 신지애는 라운딩 중이었다.

4시께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서는 "밥 좀 먹고 오면 안 될까요.

너무 배가 고파서요"라고 했다.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영락없는 대학 1학년생(신지애는 올해 연세대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모습이었다.

# "배가 아프잖아요"

신지애는 US오픈에 출전하기 전엔 "지애야,편도 항공권만 끊어.꼭 우승해서 한국으로 돌아오지마"라는 농담을 동료로부터 들어야 했다.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라는 얘기다.

우승을 너무 자주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미안한 마음 있으면 안 되죠.프로잖아요."

국내외 대회를 강행군하는 이유는 상금 욕심보다는 "배가 아파서"라고 했다.

"제가 나가면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피곤하다고 안 나갈 수 있겠어요.

다른 사람이 우승하면 배가 아프잖아요."

신지애의 대담함은 전혀 긴장하지 않는 성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주변의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하느냐는 물음엔 "관심과 집중을 받는 게 정말 좋아요.

저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갤러리가 많을수록 더 즐거워요"라고 말한다.

전현지 코치는 신지애의 이런 자신감의 밑바탕엔 타고난 감각과 최고 수준의 기술이 자리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지애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닐 터."제가 좀 눈치를 봐요.

(누구 눈치요?라고 물었다).아빠요.

그래서 자주 다퉜어요.

요즘 아빠가 골프백을 안 메시는 것도 그래서죠.저는 다양하게 샷을 해 보고 싶은데 아빠는 확률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샷을 고집하시거든요.

하지만 앞으론 더 창조적인 샷을 할 생각이에요."

# 대화도 전략?

신지애의 플레이를 TV를 통해 지켜보든 필드에서 구경하든 언제나 해맑게 웃는 걸 보게 된다.

잘 치면 활짝 웃고 못 쳐도 미소를 머금는다.

신지애는 요즘 국내 대회에서 자주 함께 플레이하는 지은희나 안선주와도 경기 내내 재잘거리며 웃는다.

"대회할 땐 동반 플레이어와는 골프 얘긴 전혀 안 해요.

골프와 상관없는 TV 프로그램 얘기나 다른 신변잡기적인 걸 말하죠.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얘기하는 게 전략이거든요.

여기가 그런 면에서는 좀 치열하죠.'이번엔 언니가 우승해' 이런 말도 다 심리전이거든요."

# "앞으로 10년 짧고 굵게 할거예요"

19살 신지애는 그동안 어린 나이에 감내하기 힘든 고난도 경험했다.

2003년엔 어머니를 교통사로로 잃고 함께 사고를 당한 두 동생을 간호하기 위해 1년 정도 병실 간이침대에서 지내기도 했다.

이후 15만원짜리 월셋방에서 네 식구가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골프를 했던 사실이 알려져 '미소천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앞으로 10년.주변에선 박세리의 신화를 이을,어쩌면 박세리를 넘어설 선수라는 평가도 나온다.

신지애의 말은 의외였다.

"이제 겨우 프로 2년차인데요 뭐.저도 몇 년 반짝 하고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따라가는 입장인데요.

10년 뒤엔 솔직히 뭘 할지 모르겠어요.

다만 짧고 굵게 골프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요.

아주 오래 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골프에 투자한 시간만큼 다른 일에도 시간을 보내야 겠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지애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미국 무대를 경험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미국에서 해 보니까 아주 재미있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가려고요.

영어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시즌 중엔 시간이 잘 안 나서 걱정이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해 달라고 했더니 드라이버를 다리 사이에 끼고 폴짝폴짝 뛰었다.

우승 때마다 "엄마가 하늘에서 늘 지켜주신다"고 말하는 신지애.그녀는 어떤 카이로스(의미있고 예비된 특별한 시간)를 만나 세계로 도약하게 될까.


< 신지애는 … >

1988년 4월 28일생/신장 156cm
2005년 KLPGA 입회
2006년 KLPGA 2승
2007년 함평골프고등학교 졸업
연세대 체육교육학과 입학
KLPGA 4승(상금랭킹 1위)
US오픈 6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