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US여자오픈에서 정상에 오른 힐러리 런키(24.미국)는 재수(再修) 끝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티켓을 얻은 철저한 무명 선수. 아마추어 시절은 물론 프로 입문 이후에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런키가 정상급 선수만 차지했던 US여자오픈 우승컵을 연장전 끝에 품에 안은 것은 올해 LPGA 투어최대의 '사건'이 됐다. 런키가 이번 대회에 출전하느라 치른 힘든 과정도 화제가 되고 있다. 상금순위나 각종 메이저대회 성적 등을 토대로 주는 자동출전권을 받지 못한 런키는 미국 각지에서 열린 18홀 1차 예선을 거쳐야 했고 이어 36홀 최종 예선전을 치러 어렵게 펌프킨릿지골프장 그린을 밟을 수 있었다. 정규라운드 72홀과 플레이오프 18홀을 합쳐 런키는 이번 대회 정상에 서기까지 무려 144홀 동안 피말리는 경기를 펼친 셈이다. 1946년부터 시작된 US여자오픈에서 예선을 거쳐 출전한 선수가 우승한 것도 런키가 처음이다. 13세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골프클럽을 쥔 런키는 서부 지역 명문 스탠퍼드대학 시절 잠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생골프대회에서 2차례 우승을 거둔 적이 있을 뿐 미국골프협회(USGA) 주관아마추어대회에 7차례나 출전했지만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다. 2000년 국가대표로 커티스컵에 출전했고 대학 올스타에 뽑힌 것이 런키가 내세울 수 있는 주요 경력. 프로 입문도 순탄치 않았다. 2001년 프로로 전환, LPGA 퀄리파잉스쿨에서 공동31위에 그치며 풀시드를 얻는데 실패했고 2002년 제한시드 선수로 10차례 경기에 출전했으나 톱10에는 한번도 들지 못하고 고작 3만509달러를 벌어들였을 뿐이다. 그해 다시 퀄리파잉스쿨로 돌아간 런키는 공동17위를 차지, 2년만에 풀시드를 따냈다. 올해 LPGA 투어에서 런키의 성적 역시 별 볼 일 없었다. 12차례 대회에 나서 톱10은 한차례도 없었고 벌어들인 상금이라야 3만9천208달러로 내년 시드권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순위였다. 평균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238.7야드로 전체 LPGA 투어 선수 가운데 135위에 머물고 있고 아이언샷 그린 적중률도 56.4%에 그쳐 하위권을 맴돌았다. 다만 18홀당 평균 퍼트개수가 29.06개로 전체 LPGA 투어 선수 가운데 5위에 올라 그린 플레이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마녀의 골짜기'라는 악명을 떨친 난코스에서 런키에게 우승의 영광을 안겨 준 것도 정교한 퍼트 덕분이었다. 런키는 정규 라운드 72홀 동안 홀당 1.53개의 퍼트로 물방울도 흘러내릴 것 같은 빠른 그린을 잘 다스렸다. 특히 안젤라 스탠퍼드와 켈리 로빈스 등과 함께 치른 18홀 플레이오프에서는 불과 23개의 퍼트로 경기를 마칠 정도로 런키의 퍼팅은 발군이었다. 이번 우승으로 런키는 무명의 설움을 털어냈을 뿐 아니라 두둑한 상금과 메이저대회 우승자로서 다양한 혜택을 누리게 됐다. 런키가 받은 우승 상금 56만달러는 LPGA 투어 사상 단일대회 우승상금 가운데 최고액. 상금순위 88위였던 런키는 단숨에 아니카 소렌스탐, 박지은, 박세리에 이어 랭킹 4위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탔다. LPGA 투어에 입문해 2년간 벌었던 상금의 10배에 이르는 거금을 챙긴 것. 또 메이저대회 우승자에게는 5년간 풀시드를 주기 때문에 퀄리파잉스쿨을 다시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당분간 잊고 지낼 수 있게 됐다. 더구나 앞으로 4개 메이저대회에 예선없이 출전할 수 있고 하반기에 주로 열리는 각종 초청대회에도 꼬박꼬박 출석할 수 있다. 이번 대회 동안 숱한 선수들의 눈물을 짜냈던 펌프킨릿지골프장의 '마녀'는 런키에게는 재투성이 소녀 신데렐라를 아름다운 공주로 변신시킨 착한 마술사였던 셈이다. (서울=연합뉴스) 권 훈기자 kh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