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승부를 앞두고 애써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는 모습이었으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여유를 숨기지 못했다. 4강 진출로 목표를 이미 초과달성한데다 성격상 '친선경기'나 다름없게 치러지는 3-4위전의 분위기 때문에 승부사로서의 면모는 아무래도 엷어질 수 밖에 없었던것. 그러나 히딩크 감독의 여유는 경기 시작 1분도 안돼 수비진의 실수로 선제골을 내주자 씻은 듯 사라졌다.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경기를 즐기려던 히딩크 감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토끼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후 히딩크 감독의 눈빛은 방심한 선수들에 대한 질책을 쏘아 보내듯 이글거렸다. 이을용의 중거리 슈팅이 빗나가자 귀를 만지면서 "오늘 쟤들 왜 저러는거야"라는 혼잣말을 내뱉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을용의 프리킥이 멋지게 터키 골문을 가르자 히딩크 감독은 박수를 치며 "바로 저거야!"하듯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어퍼컷 동작은 없었다. 비로소 '내 제자들이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인지 히딩크 감독은 잠시 물을 마시러 터치라인 근처로 나온 설기현과 안정환에게 빠른 입놀림으로 공격 작전지시를 내리는 등 활기를 띠었다. 한국이 거세게 터키를 밀어 붙이자 고개를 끄덕여 만족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잇단 역습에 내리 2골을 추가로 내주자 히딩크 감독은 다시 잠잠해졌다. 때때로 고개를 돌려 선수들의 답답한 플레이에 대한 못다땅한 심정을 표현했지만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진 자세로 터치라인 근처를 배회할 뿐이었다. 종종 핌 베에벡 코치와 경기 운영에 대해 의논도 나눴으나 표정은 '이대로 지고마는가'하는 찹착한 심경이 묻어났다. 후반 인저리 타임 송종국의 벼락같은 슈팅이 터키 골키퍼 레치베르의 손 끝을 스치듯 골대안으로 빨려 들어가도 히딩크 감독은 요란한 골 세리머니는 없었다. 다만 '히딩크의 황태자'라 불릴만큼 총애를 아끼지 않았던 송종국의 월드컵 첫골을 흐뭇하게 여기는 인상은 얼굴에 가득했다. 경기가 끝나도 히딩크 감독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2개 대회 연속 3-4위전 패배이 씁씁했던지 히딩크 감독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입맛만 다셨다. 시상식이 시작돼 선수들에게 메달이 주어질 때도 굳어 있던 히딩크 감독의 얼굴은 4위 메달을 받을 때 잠깐 펴졌을 뿐. 그러나 시상식을 마치고 선수들이 헹가래를 치러 다가오자 비로소 히딩크 감독은 환한 표정으로 선수들을 맞았다. '물건 떨어지면 어떻게 해'라며 양복 웃저고리 주머니를 비우는 시늉으로 사람들을 웃긴 히딩크는 헹가래를 받은 뒤 양손을 모으고 관중석에 공손한 인사를 건네며 진한 패배의 아쉬움을 달랬다. (서울=연합뉴스) kho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