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거' '또 쾌거', 불가능으로 여겼던 월드컵 8강의 신화가 현실화됐다. 48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낸 한국 축구가 새천년 이른 아침, 이슬을 한껏 머금고우아한 자태로 활짝 입을 벌린 무궁화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광화문에서, 대학로에서, 광주에서, 부산에서 , 대전에서, 땅끝마을 마라도에서,집집마다 거리마다 진홍의 진달래빛 감격이 온나라를 해일처럼 뒤덮었다. 23인의 태극전사와 4천700만 국민의 에너지가 하나로 뭉쳐져 꿈의 구연 월드컵에 엄청난 지진을 일으켰다. 16강에 진출했을때만해도 '찻잔속의 태풍' 정도로 여겨졌던 한국 축구가 가공할태풍으로 세계 축구판을 휩쓸고 있다. 반세기의 비원이었던 월드겁 1승 달성, 꿈으로만 여겼던 16강 진출... 새로운축구사의 잉크가 채 마를 틈도 없이 숨가쁘게 새역사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정말이지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빗장을 풀어(이탈리아 제압) 브레이크가 없어져버린 한국축구가 어디까지 질주할 것인가. 폴란드전 52만명, 미국전 77만명, 포르투갈 278만명, 이탈리아전 400만명...거리응원단의 숫자는 또 얼마나 불어날 것인가. ◆영광의 드라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신화'는 거스 히딩크라는 푸른 눈의 외국인 감독과 평균연령 27세인 23명의 태극전사들이 500여일만에 엮은 한 편의 장쾌한 드라마다. 한.일공동월드컵 개최가 확정된 지난 96년 이후 4년째 되던 2000년 한국 축구는시니드올림픽 8강진출 실패, 12회 아시아선수권대회 3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면서 위기감이 팽배했다. 월드컵 개최국으로 본선엔 직행했으나 이대로는 실제 조별리그에서 세계의 강호들과 겨뤄 월드컵 1승과 16강 진출을 따낸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고심끝에 축구협회는 국내 감독으로는 국민의 '비원'에 부응할 수 없다고 보고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에서 0-5의 치욕적 참패를 안겨준 네덜란드인 거스 히딩크를감독으로 영입, 그 해 12월 18일 계약서에 사인했다. 히딩크는 취임 일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고 말한뒤 국가대표팀의 밑그림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의 '월드컵 1승' 염원을 안고 출범한 히딩크호는 곳곳에서 암초를만나 혹독한 시련을 맞는다.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스컵(5.30-6.10)에서는 월드챔피언 프랑스에 0-5의 참패를당하며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고 8월 유럽 전지훈련에서는 체코에도 0-5로패해 히딩크는 '오대영'감독이라는 오명을 감수해야 했다. 올 해 첫 원정인 북중미골드컵(1.20 -2.3)과 우루과이와의 평가전(2.14)까지는2무4패.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히딩크는 그러나 특유의 뚝심으로 서서히 자기의 색깔을 밀어붙여 '一자 쓰리백'을 도입했고 공격-미드필드-수비 사이의 공간을 좁히는 '콤팩트 사커'를 위해 여러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선수들에게 요구했다. 그는 또 1년여의 '경험'을 통해 선수들의 체력이 약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확인했고 이때문에 세계 강팀들에 비해 기량이 부족한 대표팀의 유일한 탈출구인 전.후반을 쉼없이 뛰어야하는 압박축구를 구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이때부터 히딩크는 강도높은 100일간의 파워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의 체력과정신력을 키웠고 홍명보-최진철-김태영으로 이어진 탄탄한 수비진을 구축했다. 특히지구력 강화에 무모하리만큼 집착했다. 혹독한 담금질을 견내내는 선수들만이 살아남았다. 박지성, 송종국, 김남일, 이을용, 이영표, 이천수 등이 그의 조련으로 새로 태어났고 결국 시간은 히딩크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체력과 압박능력을 갖게 된 대표팀은 4월20일 코스타리카와의평가전에서 2-0으로 완승했고 4월27일 중국과 득점없이 비겼으나 5월16일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서 4-1로 대승했다. 히딩크는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싸움닭이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강한상대와 겨뤄 내성을 길러야한다. 히딩크는 바로 여기에 착안해 최강팀들을 마지막스파링 파트너로 선택했다. 5월 21일엔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불러들여 1-1로 비겼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선수들은 월드컵 개막 4일전 FIFA랭킹 1위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2-3으로 패하긴했으나 대등한 경기를 펼쳐 어느팀을 상대해도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맞은 월드컵 본선. 태극전사들은 6월 4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벌어진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폴란드에 2-0으로 완승, 48년만에 '월드컵 1승'을 조국에 바친뒤 미국과 1-1로 비겼고 최종전에서 FIFA랭킹 5위로 우승후보인 포르투갈을박지성의 결승골로 꺾고 2승1무, 조1위로 16강행을 결정지어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드라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민적 성원과 "아직 배가 고프다"는 히딩크의 뜻을 받들어 태극전사들은 마침내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나는 '아주리군단'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끝에 안정환의 결승골로 117분만에 격파하고 8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인고의 나날들 월드컵 8강의 신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48년에 걸쳐 통산 6차례(5차례 연속) 본선에 진출하며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한국은 54년 스위스대회때 처음으로 본선 무대를 밟은 이후 지난 프랑스대회까지 14차례 경기에서 단 1승도 건지지 못한채 4무10패의 초라한 기록에 머물렀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일어선 한국은 54년 월드컵 예선에서 '숙적' 일본을 1승1무로 제치고 본선에 처음으로 올랐으나 끔찍한 '신고식'을 치렀다.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 멀고 먼 길을 돌아 경기 당일 새벽에야 스위스에 가까스로 도착한 한국은 최악의 컨디션으로 당대의 골잡이 푸스카스가 이끄는 헝가리와1차전에서 마주쳤으나 한 골도 뽑지 못하고 전.후반 무려 9점을 내줘 월드컵 본선최다 득점차 기록을 경신하며 대패한 뒤 터키와의 2차전에서도 0-7으로 완패했다. 서독과의 경기가 남아있었으나 "순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기는 하지 않는다"는 대회 규정과 경비 부족으로 귀국짐을 꾸려야 했다. 이후 32년간 한국은 지역예선에서 번번이 좌절하는 바람에 86년 멕시코 대회까지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한국 축구의 암흑기였다. 이 와중에서도 북한은 66년 잉글랜드대회 본선에 올라 소련과의 1차전에서 0-3으로 패했으나 2차전을 칠레와 1-1로 비긴뒤 최종전에서 전반 42분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1-0으로 제압하고 8강에 올라 한민족의 축구혼이 잠들지않았음을 과시했다. 북한은 준준결승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먼저 3골을 뽑았으나 에우제비우에게 4골(페널티킥 2골포함)을 허용, 4-5로 아깝게 역전패했다. 희망의 싹은 청소년대회에서 움텄다.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은 김주성-김종부의 활약으로 4강에 오르는 '이변'을연출하며 성인축구의 개화를 예고했다. 86년 멕시코대회 본선에 다시 얼굴을 내민 한국은 90년 이탈리아대회, 94년 미국대회, 98년 프랑스대회 본선에 연속 진출했으나 4무8패의 참담함 성적에 그쳤다. 그래도 발전은 있었다. 멕시코대회에서는 박창선이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25m중거리슛을 날려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서 골맛을 봤다. 이탈리아대회에서도 3패를 당하긴 했으나 황보관이 강호 스페인에 날린 30m 대포알 슈팅이 골그믈을 갈라 '멋있는 슛 베스트5'에 뽑혔다. 미국 월드컵때는 지역예선에서 이라크가 일본을 이겨주는 바람에 뒷문으로 본선에 진출했으나 홍명보, 서정원 등의 활약으로 스페인, 볼리비아와 비기고 독일에 패해 2무1패로 본선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프랑스대회에서는 건국이래 최고의 축구스타인 차범근을 감독으로 맞아 그 어느때보다 국민들의 기대가 컸으나 멕시코전에서 선제골을 뽑고도 1-3으로 패한뒤 거스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미 탈락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에서 감독 경질이라는 초강수를 띄운 한국은 마지막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투혼을 발휘, 1-1 무승부를 기록하고 귀국했다. (서울=연합뉴스) 특별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