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수도 미국선수도 모두 지쳐 가고 있었다. 한국은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었고 후반 막판 체력이 떨어지는 약점을 안고 있는 미국도 불안한 리드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웬만큼 체력이 좋은 선수들이라도 체력이 바닥난다는 후반 20분 기점을 이미 10여분 지나온 상태라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선수들의 몸놀림이 눈에 띄게 둔해져 갔다. 이때쯤 왼쪽 사이드라인에서 볼을 잡은 이을용이 몇 발짝 앞쪽에 있는 이천수가 상대수비에 막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직접 볼을 잡고 중앙으로 파고 들었다. 이을용 앞에 있던 도너번은 추격에 실패하자 반칙으로 끊었다. 센터라인에서 별로 멀지 않은 지점에서 반칙이 선언됐기에 미국 선수들도 별로 긴장하지 않은 채 느슨한 수비를 펼쳤다. 키커는 이을용. 이을용은 코너쪽으로 재빨리 빠지면서 볼을 달라는 이천수의 요구를 묵살(?)한채 골문을 향해 가볍게 왼발로 센터링했고 안정환과 최진철이 잽싸게 볼을 향해 돌진했다. 볼은 앞쪽에서 달려들던 안정환의 머리 옆부분을 강하게 맞은 뒤 상대 골네트 오른쪽 귀퉁이에 박혔다.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관중석은 물론 전국민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린 순간이었다. 몸을 던져 헤딩하느라 땅바닦에 나뒹굴었던 안정환은 골을 확인한 뒤 곧바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왼손 반지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코너플래그쪽으로 돌진했다. 동료 선수들도 함성을 지르며 달려 간 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김동성이 미국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당해 금메달을 빼앗긴 장면을 연상시키는 골세리모니를 펼쳤고 미국선수들은 넋을 잃었다. (대구=연합뉴스) sungj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