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에 찌들대로 찌든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월드컵 우승뿐이다" 태환정책 폐지와 페소화 평가절하 5개월만에 달러화에 대한 페소화의 가치가 3분의 1 이상 줄고, 그나마 예금지급 제한조치로 319억페소(미화 92억4천600만달러)가 은행권에 묶여 있어 아르헨 국민은 하루하루가 고역일 수밖에 없다. 빈민층은 전체 국민의 40% 이상으로 늘어났고, 정부가 발표한 실업률 또한 20% 이상을 웃돌고 있다. 3년여동안 지속되던 경제난끝에 지난 해 12월 디폴트(채무상환불이행) 선언에 이어 예금지급 동결(일명 코랄리토)로 경제가 폭삭 주저앉으면서 아르헨 국민은 희망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 경제가 조금이라도 호전될 기미를 보이면 그나마 기대를 걸 수 있지만 자금줄을 움켜쥔 국제통화기금(IMF)은 `감놔라 대추놔라' 간섭만 하고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고,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은 국민대로 항의시위부터 파업, 소요사태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빈털터리 정부로부터 듣는 답변이라곤 `좀더 기다려보자'거나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자'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날씨마저 겨울철로 접어들어 꽁꽁 얼어붙은 아르헨 국민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월드컵 우승이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었던 `축구신동' 디에고 마라도나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요즘 아르헨 국민은 월급을 받으면 보름을 넘기기가 어렵다. 고기조각을 넣은 냄비라도 저녁상에 오르면 그것은 행운일 정도로 가난에 찌들어가고 있다"며 "평가절하와 예금동결 시대에 일상에 찌든 국민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줄 것은 오직 월드컵 우승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일 월드컵 우승은 미드필더 세바스티안 베론이나 `바람의 아들' 클라우디오 카니자, 대표팀 감독 마르셀로 비엘사 혼자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팀워크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우승의 그날, 빈곤과 분열에 찌든 아르헨 국민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난이 극심하다는 것은 월드컵때면 불티나게 팔리는 TV 수상기와 개최국이 어느 나라건 떼지어 몰려다니는 극성 축구팬들의 원정응원이 눈에 띄게줄었다는 데서 잘 읽을 수 있다. 아르헨 최대 규모의 가전제품 도매상인 가바리노의 경우 이번 월드컵 시즌의 TV판매량이 '98프랑스 월드컵때보다 40%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더구나 한국과 일본 및 아르헨티나간 12시간 시차로 가난과 피곤에 지친 축구팬들이 새벽을 밝히면서까지 축구경기를 관전할 의욕도 상실해 TV 대신 비디오 녹화기를 선호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프랑스 월드컵때는 각 여행사별로 극성축구팬 1만여명이 떼지어 표를 끊어 원정응원에 나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줄었다. 4년전 350명을 프랑스에 보냈다는 퍼롱 여행사측은 "이번 월드컵 시즌에 일본여행을 예약한 관광객은 10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여행사 관계자는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려면 1인당 최소한 1만2천달러가 드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경제난에 아랑곳하지 않는 부유층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1만2천달러는 아르헨 근로자 700명의 1개월치 월급에 맞먹는 액수이다. 경제위기 한파는 언론사에도 예외없이 들이닥쳤다. 프랑스 월드컵 당시 아르헨 언론사는 90명 이상, 86년 멕시코 월드컵때는 100명 이상을 파견했으나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이다. 유일한 스포츠신문인 '올레(Ole)'의 경우만 취재기자 4명과 사진기자 1명 등 5명을 일본에 파견, 체면을 유지했다. 경제난에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아르헨 국민은 대표팀이 전하는 우승소식만을 목을 빼놓고 기다리야 할 처지이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성기준특파원 bigp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