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등등하던 '트루시에호'에 냉기가 감돌고있다. 축구종가 잉글랜드와 월드컵 2연패를 노리는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한 '히딩크호'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불과 한 달전만 해도 "월드컵 8강까지 간다"는 장밋빛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유럽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 2진과 노르웨이에 참패를 당한 뒤로 "우리를 제대로 보자"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팽배해졌다. 고집불통이던 '하얀 마법사' 필리프 트루시에 일본대표팀 감독의 태도도 뒤늦게나마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스페인 원정 때 지네딘 지단에게 사인을 요청하는가 하면 최종엔트리 발표장에는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는 등 잇단 성적 부진 속에서도 기행을 서슴지 않는 그였지만 25일 스웨덴전에서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아키히토 일왕이 지켜 본 이날 경기 후 그는 통역 없이 완벽한 일본말로 "우리 함께 힘냅시다. 모두 응원해 주십시요"라고 우렁차게 외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본 국민을 향한 그의 호소에 대해 "미리 동정론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라는 일부 해석도 있으나, 트루시에 감독 자신과 일본축구계가 다급해진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트루시에의 자신감이 떨어졌다는 정황은 당장 선수 기용에서 포착된다. 마지막 평가전이 된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부동의 왼쪽 날개 오노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후반 원톱 야나기사와와 센터백 모리오카 자리에 30대 노장 나카야마와 아키타를 전격 투입한 것. 모리오카를 스리백의 중심축으로 `왼쪽 공격, 오른쪽 수비'의 전형에 좀처럼 메스를 대지 않았던 트루시에였기에 일본 언론은 놀랍다는 차원을 넘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일색이다. 더욱 큰 문제는 트루시에의 마지막 실험이 별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오노는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주지 못한 채 후반 11분 브라질 귀화선수 알렉스로교체됐고 나카야마, 아키타 두 노장도 투지만 앞섰을 뿐 노련미를 그라운드에 풀어내지 못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노련미와 변칙 플레이에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지만 효과가 신통치 못해 주름살만 더 생긴 셈이다. 대망의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안팎의 암초에 발목이 잡힌 트루시에호가 `첫 개최국 16강 탈락'의 불명예를 피해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요코하마=연합뉴스) 김재현기자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