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 때 은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점에서 내가 쓴 책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우셨다는 얘기,그 책을 새벽까지 단숨에 읽으셨다는 얘기 등을 쏟아놓으셨다. 좋아하는 그림을 보면 쓰다듬어가며 좋아하시는 분,환갑을 훌쩍 넘겼음에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분이시다. 그 분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맑은 녹차 빛일 것이다. "영분아,글을 읽으니 참 좋다.앞으로 골프를 치면서도 나뭇잎만 보지 말고,숲도 보고,산도 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통화를 마친 후,혹시 내가 쓴 글이 나뭇잎만을 바라보고 쓴 글이 아니었나 하는 창피함이 들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러했다. 올 한해의 골프만 되짚어봐도 알 수 있다. 골프장에 허둥지둥 도착해 정신없이 티샷하고,스코어카드에 적히는 숫자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폈다를 반복하기를 수십회. 러프에 숨어버린 볼,벙커에 빠져버린 볼,그 작은 볼 하나를 쫓아 전전긍긍하던 기억들로 가득 찼다. 순간순간의 토라짐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캐디의 도움이 나만 외면하는 것 같아 토라지고,동반자가 불쑥 던진 한 마디에 신경 쓰여하며 말이다. 스코어라는 작은 나뭇잎에 끌려다니는 사이 너무 많은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곳에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해준 동반자라는 포근한 나무도 있었고,또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느끼게 해준 골프라는 푸른 숲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 아름다운 숲에 들어가서 나뭇잎만 따다가 나와버리다니…. 얼마 전 광화문 한 건물에 걸린 시구가 떠올랐다. '울타리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맨드라미 접시꽃은 붉은 물이 들었다만,나는 이 가을날,무슨 물이 들었는고…'라는 글. 산으로,들로 천방지축 돌아다닌 내 일년의 색깔은 아마 울긋불긋 '가벼운 빨간 색'일 것이다. 한 샷 한 샷,하루 하루에 매달려 달려왔으니 깊은 물이 들었을 리 만무하다. 한해의 끄트머리에 서니 이런 생각이 든다. 이 가벼운 빨강도 쌓이면 깊어질는지,나와 내 골프도 맑은 녹차 빛이 되는 날은 오는 건지…. 고영분 < 골프스카이닷컴 편집장 moon@golfsk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