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은 골프실력이 뛰어난 만큼 레슨도 잘했다. 특히 체격에 맞는 레슨을 해줬는데 어떤 프로보다 더 적절하게 가르쳐줬다. 유재흥 전 국방부장관의 회고담 한토막. "50년대말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나는 골프에서 라이벌 관계였는데 허 회장이 김 장관을 코치하는 날이면 난 꼼짝없이 패했다.그래서 화를 내면 나한테도 코치를 해주었는데 그날은 김 장관이 죽을 썼다" 허 회장은 당대 최고의 프로인 한장상에게도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허 회장은 남서울CC 헤드프로였던 한 프로를 불러 "골프는 기술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이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사업가가 돈을 벌려고 하면 절대 돈이 안벌린다.돈이 따라오게 해야 한다.프로는 우승컵이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한 프로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허 회장은 "대회에 나가 이날 잘 쳐야 우승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지금 치는 샷이 내 일생의 마지막 샷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누가 우승하겠느냐"며 "스코어에 연연하지 말고 한 샷 한 샷에 목숨을 걸고 치라"고 충고했다. 한 프로는 이러한 조언 덕에 이듬해인 72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했고 한국오픈을 3연패하는 등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당시 서울CC에는 연령대별로 모임이 있었다. 최연장자는 '목성회',그 밑으로 '목동회''군자회''상록회'가 만들어졌다. 허 회장은 '목동회'에 소속돼 있었는데 이 모임에는 민복기 전 법무부 장관,고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고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고 김성곤 동양통신 회장,고 최세황 국방부 차관,고 장병찬 이천전기 사장,안희경 서울지검 부장검사 등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멤버였다. 이들은 워낙 잘 뭉치고 한번 모이면 시끌벅적해서 다른 사람들이 소리만 들어도 이들의 모임인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목동회의 슬로건은 '일은 일터에서,건강은 골프장에서,술은 청운각에서'였을 정도로 화끈한 모임이었다. 허 회장은 골프에서 내기를 하면 항상 이겼다. 액수는 절대로 크게 하지 않고 9홀에 1천원,이런 식으로 했다. 이 돈도 따면 다시 다 돌려줬다. 실제 돈은 오고가지 않은 채 약간의 긴장감을 위해 가공의 내기를 즐긴 것. 평소에는 골프에서 내기를 하는 것에 대해 "골프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골프룰에 관한 한 지나칠 정도로 보수적이었다. 티잉그라운드에서는 전 홀에서 제일 잘 친 사람이 꼭 '오너(honour)'가 돼야 했고 퍼팅도 먼 거리부터 먼저 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볼이 디보트 자국에 들어가도 절대 빼내고 치는 법이 없었다. 당시 '싱글' 골퍼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골퍼들 사이에서는 싱글이 앞에 가면 절대로 앞질러 가지 않았고 기생집에 가더라도 제일 고운 아가씨를 싱글골퍼 옆에 앉히는 등 깍듯이 대접했다. 허 회장은 자식들에게도 일찌감치 골프를 가르쳤는데 막내 아들인 허광수 현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에게 정성을 들였다. 막내아들이 핸디캡 3∼4 정도로 실력이 늘자 "두 형들은 착실히 공부를 잘하니 만일 원한다면 프로골퍼로서의 커리어를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프로골퍼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허 회장은 아내에게도 골프를 가르쳤다. 예순살이 넘은 아내에게 골프를 가르치기 위해 집 뒷마당에 간이연습장까지 만들어줬다. 이에 부응하듯 아내도 매일 5백개 이상의 볼을 때려 손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였다. 허 회장은 아내가 골프를 배울 때쯤 "아내 데리고 골프장에 한번 나가는 게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 ◇도움말=장홍식 전 극동석유 회장,유재흥 전 국방부 장관,임영선 대한골프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