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허정구 삼양통상 명예회장은 한국의 "Mr.골프"로 불린다. 그만큼 국내 골프계에 남긴 족적이 넓고 깊다. 지난 1961년 삼성을 떠나 스포츠용품 전문제조회사인 삼양통상을 설립한 허 명예회장은 68년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초대와 2대 이사장을 맡아 오늘날 KPGA의 기틀을 다졌다. 74년에는 골프장 업주들의 모임인 한국골프장사업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다. 76년에는 한국골프협회(현 대한골프협회) 6대회장을 맡아 8대까지 역임했다. 국내 3대 골프단체의 수장을 지낸,한국골프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다. 평소 한국골프가 세계적인 수준에 크게 뒤떨어진 것을 아쉽게 여긴 그는 78년부터 주니어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허 명예회장은 골퍼로서는 최고의 명예라고 할 수 있는 영국왕립골프협회(R&A;Royal & Ancient Golf Club)의 유일한 한국인 멤버다. 70년에는 골프장 사업에도 뛰어들어 국내 명문코스 중 하나인 남서울CC를 만들었다. 이한원 대한제분 창설자와 함께 하던 중 장홍식 전 극동석유 회장이 합류해 셋이서 시작했다. 남서울CC와 얽힌 일화 한 토막. 70년대 초반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 당국자가 남한을 방문했다. 이때 사절단은 충무공 이순신 묘를 참배한 뒤 올라오는 길에 남서울CC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돼 있었다. 이에 따라 골프장에서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고 정부에서도 신갈 주변의 낡은 집들을 허물고 새로 짓는 등 준비작업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북측 사절단의 남서울CC 방문이 취소됐다. 박 전 대통령이 "캐디들이 무거운 백을 들고 걷는 게 보기 안좋다"며 골프장 방문을 취소토록 지시한 것. 허 명예회장은 1954년 38세 때 제일제당 전무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골프를 접했다. 어느날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고 이병철 삼성 명예회장이 클럽 한 세트를 선물하면서부터였다. 이 명예회장은 "젊을 때 건강에 신경쓰지 않으면 나이 들어 후회합니다.나는 일본에서 골프를 배웠는데 사업에도 도움이 됐어요.그러니 이제부터 같이 골프를 합시다"라고 권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허 명예회장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서울 군자동에 위치한 서울CC를 열심히 드나들었다. 당시 국내 유일의 프로골퍼였던 연덕춘씨의 지도를 받았다. 고려대 재학시절 권투선수에다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던 그는 골프채를 잡은 지 1년 만에 '싱글 핸디캐퍼'가 됐다. 허 명예회장은 드라이버샷 거리가 '당시' 2백30야드에 달할 정도의 장타자면서도 쇼트게임의 귀재였다. 특히 퍼팅은 대단한 장기였는데 한장상 등 당대 최고의 프로들도 그에게서 한 수 배울 정도였다. 어프로치샷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린 주위에서 쳤다 하면 1퍼팅 거리에 붙여 동반자들의 기를 질리게 했다. 스윙은 그렇게 '스탠더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기 흉할 정도도 아니었다. 골프채에도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새 골프채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고 하나 장만하면 오랫동안 썼다. 대신 그는 골프장을 무척 가렸다. 대충대충 만든 코스에서는 골프를 치려고 하지 않았다. 영국에 가면 세인트앤드루스나 뮤어필드,글렌이글GC 등 브리티시오픈을 개최할 정도로 격을 갖춘 명문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미국에서도 10대 명문 골프장만을 찾았다. 친구들은 그를 골프를 사랑했을 뿐 골프광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골프는 자신의 일을 끝내고 시간이 있을 때 재충전을 위한 도구였다. 그는 사무실에 최신 일본 골프잡지를 두고 숙독하며 골프를 연구했고 드라이버와 퍼터 연습도 짬짬이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매치플레이로 진행된 59년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2위를 하기도 했다. 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 ◇도움말=장홍식 전 극동석유 회장,유재흥 전 국방부 장관,임영선 대한골프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