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구만, 이제 다시 시작인데…"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6일 먼 이국땅에서 접한 이동찬(80) 코오롱 명예회장은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87년 정 감독과 손잡고 코오롱 사단을 만들며 한국 마라톤의 전성기를 열어 젖힌 이 회장은 요양차 캐나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어 직접 빈소를 방문하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애도의 뜻을 유족에게 전했다. 정 감독이 이 회장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한국 마라톤은 아직까지도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일. 일본에서 갖은 핍박과 탄압을 이겨내며 학업에 열중하던 중, 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옹의 쾌거를 지켜본 이 회장은 그때부터 마라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다렸던 해방과 동시에 찾아온 것은 한국 마라톤의 '암흑기'였고 30년 넘게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이 회장은 80년 2시간15분벽 돌파에 5천만원, 2시간10분벽 돌파에 1억원이라는 파격적인 포상금을 내걸만큼 마라톤 부흥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이 회장은 당시 육군 육상단 감독으로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한 정 감독을 찾아갔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 감독에게서 한국 마라톤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7년 뒤, 이 회장은 직접 육상단을 만들 계획을 세웠고 정 감독에게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 따 봅시다"며 수장을 맡기면서 한국 마라톤의 미래를 짊어질 육상단은 정식 출범했다. 한국마라톤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결국 12년전에 걸렸던 포상금은 92년 벳푸마라톤에서 황영조에 의해 10분 벽이 깨지면서 주인을 찾아갔고 그해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그토록 갈망했던 금메달까지 가져왔다. 정 감독과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는 황영조를 지켜보던 이 회장의 눈가에는 56년전 손기정 옹을 바라보면서 흘렀던 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봉주의 은메달까지 10년을 이어오던 정봉수 사단의 영광은 99년 겨울 이봉주, 권은주 등 주축 선수들이 탈퇴하면서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굽힐줄 모르는 집념으로 이 자리까지 온 정 감독은 이 회장의 변함없는 지원을 등에 업고 임진수, 김옥빈 등 새로운 유망주들을 키워냈으며 오는 8월 세계선수권대회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또 하나의 신화 탄생을 앞에 두고 끝내 아쉬운 숨을 거뒀다. (서울=연합뉴스) 이정진기자 transi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