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이 저 대신 나가주면 안될까요? 저 정말 치기 싫어요."

바로 다음날 새벽에 부킹이 돼있는데도 나는 전날 밤까지 대신 필드에 나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공짜 골프를 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도 치기 싫어 대타를 찾는다니...

이게 웬 배부른 소리인가?

실은 배가 불러서가 아니다.

너무도 절박해서였다.

나를 주눅들게 만든 것은 지난번의 형편없는 플레이였다.

끊이지 않는 미스 샷 때문에 동반자들이 몹시 괴로워하는 듯했고 그 시선을 받는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18홀이 어찌나 괴롭던지 다시는 필드에 나오고 싶지 않았었다.

그후로 연습이라고 해보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진 게 없는 상황에서 또 18홀을 돌아야 한다니,공짜 아니라 공짜 할아버지라도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바로 전날 밤에 대타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음날 우시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새벽 골프장으로 향했다.

아니,끌려갔다고 해야 맞다.

첫 홀 전, 한창 물오른 동반자들의 자신만만한 연습스윙도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런데 그 세 명,너무 실력을 뽐내려고 해서일까?

막상 한 티샷이 숲으로,땅 바닥으로,헛스윙으로 이어졌다.

반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하며 친 나의 첫 티샷은 웬일인지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게 아닌가?

보나마나 뒤 땅 일 것이라고 믿었던 티샷인데...

첫 홀에서 얻은 자신감은 18홀 내내 계속되었다.

그늘집에서 가장 신나게 음식을 먹은 것도 나였고,긴 퍼팅 성공 후 그린이 떠내려가라 깡충깡충 뛴 것도 나였다.

왜 18홀밖에 되지 않느냐고 못내 아쉬워하던 것 역시 나였다.

그런 내게 동반자들이 말했다.

"이렇게 좋아할 것을, 오늘 안나왔으면 어쩔뻔 했냐"고.

대회를 코앞에 두고 취소를 하겠다는 후배가 생겼다.

"나가봤자,캐디 언니만 고생시키구요,잘 자라는 잔디만 깍아먹구요,동반자들에게 민폐만 끼치는 거예요. 저 제발 안나가게 해주세요"

이런 후배에게 고참 선배언니가 다독이며 말했다.

"골프란 이상한 거야.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반드시 한줄기 서광을 보여주지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골프에 빠져들게 되고... 연애 할 때 상대가 너무 튕겨서 포기하려 하면 살짝 틈을 보이는 거 있지? 그것처럼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 새벽의 기막힌 티샷은 골프가 내 마음을 읽은 것이다.

너무 튕겨 포기하려는 것을 눈치채고선 골프가 내게 "살짝 보여준 틈"이었다.

< 고영분 방송 작가 godoc1003@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