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분 < 방송작가 >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저려서 한참을 주물렀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시간동안 움직인 부위라고는 마우스 클릭하느라 까딱거린 오른손 검지가
유일할 뿐이다.

20년전 영화에서 본 "ET"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리는 짧고, 머리는 식빵만큼 크고, 검지 손가락이 엄청나게 긴 외계인.

사실은 지구인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지않아 나도 ET의 모습이 될 듯하다.

머리 쓸 일은 점점 많아져 커져만 가고,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으니 다리는
짧아지고, 클릭하느라 오른손 검지는 자꾸 길어지고...

내 머리와 다리와 검지가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

"이러다가 우리 주인 ET되겠다. 사용하는 부위는 계속 커지고, 안쓰는
부위는 퇴화한다던데. 다른 운동이 시급해. 어떤 운동이 좋을까?"

고민끝에 나온 답이 나왔다.

처방책은 "골프"였다.

머리가 좋아했다.

"그게 좋겠다. 헤드업하면 안되고, 또 생각이 너무 깊어도 힘이 들어가서
안되니까. 난 골프를 하면 좀 쉴 수 있잖아"

다리도 거들었다.

"의자에 쪼그리고 붙어 있기도 지쳤어. 골프를 치면 10km 쯤은 힘든 줄
모르고 걸을 수 있잖아. 다리 짧아질 일도 없을거야"

가장 반가워한 것은 클릭하느라 지쳐있던 오른손 검지였다.

"와-나도 쉴 수 있겠네. 그립 잡을 때 오른손 검지에 힘주면 샷에 힘들어가
니까 안쓰잖아"

내친구 새끼 손가락도 좋아할거야.

컴퓨터 앞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라고 불평했는데.

하지만 그립잡을 때는 새끼 손가락에 힘이 없으면 안되잖아.

골프는 참 미래지향적인 운동이구나.

주인이 빨리 우리를 필드로 데려갔으면 좋겠다"

컴퓨터로 지친 몸의 아우성.

너도 나도 모니터 앞에 앉아야만 하는 이때,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운동
으로는 골프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결에 봄은 실려오고, 컴퓨터 앞에서 찌든 내 몸을 필드로 데려가야겠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말, 새 밀레니엄의 첫플레이를 부킹해놨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3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