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흥구 기자 ]


[[[ 그러고도 네가 내 친구냐 ]]]

97년 서울엔 "미나왕"이라는 샐러리맨 골퍼가 있었다.

미나왕이 "미안해 나 왕이야"의 준말인지 고조선시대부터의 왕족이라
생각하는 그의 부친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미나왕은
왕의 기질과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골프광이었다.

수년전 친구따라 처음 필드에 나갔을 때 미나왕은 18홀 그린을 벗어나며
친구에게 펀치를 한방 날렸었다.

"이 짜샤, 이 좋은 걸 몇년동안 너 혼자 했냐. 그러고도 네가 내 친구라
할 수 있냐"

미나왕은 남들보다 약간 더 노력했고 그 "약간 더" 덕분에 곧 싱글핸디캡
골퍼가 됐다.

미나왕은 일도 열심히 했고 골프도 열심히 쳤다.

그러나 "열심히"가 인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미나왕은 사장한테 불려 갔다.

"이봐 미부장.자네 명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명퇴인지 명태인지 멍퇴인지 좌우지간 미나왕은 명예퇴직을 선택해야 했다.

미부장 역시 처음엔 머리 속이 "멍한 퇴직"이었다.

그러나 미나왕은 곧 "왕"답게 생각을 추스렸다.

"좋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겠다. 이제 더 이상 내 의지에
반해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겠다. 나이 40이면 아직 절반이나 남은 인생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 하니 그 대상은 딱 한가지밖에
없었다.

도대체 골프이외에는 생각나는게 없었다.

그래서 미나왕은 "세계에서 가장 화끈한" 결론을 내렸다.

"이번 기회에 골프의 정체나 한번 파악해 보자. 그 방법은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이다. 목표가 10이면 1백% 달성해야 10이지만 목표가 1백이면 절반만
달성해도 50. 목표에 따라 40에서 90까지 차이가 나니 내 목표는 1백이다.
나이는 상관없다. 인간의 능력에 불가능은 없다"


[[[ 미나왕의 유리판 퍼팅 ]]]

그날부터 미나왕은 세계 최고 골퍼를 향해 3개년계획을 세웠다.

"무턱대고"는 뭇 백성의 방법이므로 미나왕은 분석부터 했다.

지난해 미PGA투어 통계를 보니까 드라이버거리 랭킹 1위는 존 데일리의
288.8야드였고 투어 평균은 265.5야드였다.

드라이버샷 페어웨이 안착률은 1위가 78.7%였고 평균이 68.7%.

그리고 홀당 퍼팅수는 1위가 1.709번이고 평균이 1.792번이며 파온율은
1위 71.78%에 평균 66.2%였다.

또 그린사이드 벙커샷을 파나 버디로 막는 샌드세이브부문 1위는 64%에
평균은 52.9%로 나와 있었다.

미나왕은 효율성을 따져 보았다.

"존 데일리는 3백야드 이상을 날린다. 내가 그 거리를 따라 잡기에는
기본체력과 시간이 문제된다. 그것보다는 페어웨이 키프율을 80%이상으로
올리고 퍼팅수는 홀당 1.6번대에 도전해야 한다. 또 벙커샷 도사가 돼
샌드세이브도 70%이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중의 세 부문은 힘과는 관계
없이 이룰수 있으니 나도 가능하다"

"왕"은 즉각 실천에 들어갔다.

우선 아파트를 팔고 경기도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미나왕은 뜰에 벙커를 팠고 거실엔 10m 짜리 유리판을 깔았다.

유리판 퍼팅은 볼에 사이드 스핀이 약간만 가해져도 볼이 휜다.

미나왕은 볼의 힘이 다 소진돼도 곧바로 굴러가 곧바로 멈추는 퍼팅을
목표로 했다.

세계 최고의 스퀘어 터치는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벙커샷 연습은 홀인될 때까지 했다.

어떤때는 이틀밤낮이 걸렸고 어떤때는 1주일이 걸렸다.

미나왕의 유리판 퍼팅앞에서 벤 호건의 "의자다리 1백번 연속 맞히기"는
"한전앞에서 촛불 켜는 격"이었다.

게리 플레이어의 "온종일 벙커샷 연습" 역시 미나왕 연습앞에선 "이봉주
앞에서 조깅하는 격"이었다.

그렇게 1년쯤 하고 나니 미나왕의 손에는 프로자격증이 쥐어져 있었다.

목표가 1백인 미나왕 앞에서 프로자격증은 겨우 10의 달성에 그치는 것.

마찬가지로 미나왕은 국내 오픈 대회에서도 몇번 우승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메이저만이 가득차 있었다.


[[[ 페블비치의 대혈투 ]]]

2000년 US오픈은 저 유명한 페블비치GL(골프 링크스)에서 열렸다.

그는 수차례의 지역예선을 거쳐 드디어 본대회 진출에 성공했다.

"믿거나 말거나" 미나왕은 커트오프를 통과했다.

최종 4라운드에서 미나왕은 타이거 우즈와 한조가 됐다.

물론 마지막조였다.

날씨는 음산했다.

샌프란시스코 남쪽 몬테레이반도의 6월은 기온이 섭씨 10도도 채 안됐고
폭풍전야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 드라이버-퍼터-드라이버 ]]]

"독자들 예상대로" 미나왕은 선전했고 17번홀까지 우즈와 동타를 이루고
있었다.

18번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5홀.

거리 5백40야드의 이 홀은 왼쪽이 태평양이고 오른쪽은 깊은 러프인 왼쪽
도그레그 구조.

투온을 노리려면 태평양을 가로 질러 쳐야 했다.

티잉그라운드에 선 미나왕은 뺨에 스치는 비바람을 느끼며 일생일대의
판단을 내렸다.

"아무리 바람이 거세도 우즈는 투온이 가능하다. 우승이냐 아니냐는 결국
한타. 난 우즈가 버디를 잡는다고 보고 플레이해야 한다. 따라서 드라이버는
최대한 질러야 한다. 일단은 공격을 해야 후회없는 골프가 된다"

미나왕은 40여년 인생에서 가장 힘차게 스윙했다.

볼은 뿌연 안개비속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볼은 바람에 밀려 태평양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볼은 바다와 페어웨이의 경계선쯤에 떨어져 바위를 맞고 크게 튀었다.

미나왕의 앞에는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기다렸다.

좋은 뉴스는 볼을 찾았다는 것이고 나쁜 뉴스는 스윙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볼은 잔돌위에 있었는데 백스윙을 하려니까 우뚝 솟아 있는 바위에 클럽이
걸렸다.

스윙은 태평양쪽으로만 가능했다.

그러나 미나왕은 "골프의 방법은 항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

그는 퍼터를 뽑아 들었다.

미나왕은 퍼터로 볼을 찍어 쳤다.

볼은 원 쿠션으로 바위를 맞고 페어웨이쪽으로 튀었다.

이 장면은 후에 2000년의 베스트샷으로 기억됐다.

그래도 미나왕은 거리전진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1타를 손해본 격이었다.

그린까지는 약 2백90야드가 남아있었다.

투지의 미나왕은 드라이버를 뽑아 들고 "생애 최고의 드라이버 페어웨이샷을
날린다"며 스윙했다.

그러나 볼은 그린 전면 벙커에 걸리며 모래속에 반쯤 묻혔다.

벙커샷을 올려도 4온.

반면 우즈는 점잖게 3온후 3m 버디찬스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 연습은 결정적 보답을 한다 ]]]

골프연습은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보답을 하게 마련.

미나왕의 "홀인때까지 벙커 연습"은 미나왕에게 다이렉트 홀인의 선물을
안겼다.

15m거리의 벙커샷은 볼이 굴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홀컵과 깃대사이를
"부르르" 떨며 파고들었다.

역사상 가장 멋진 우승 버디.

각본대로 우즈의 3m버디퍼트는 홀컵을 스쳤다.

시상식때 미나왕이 말했다.

"나의 우승이 전세계 샐러리맨들에게 어떤 용기나 희망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이 40의 출발은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인생이란
늦었다고 생각될때가 실은 가장 빠른 법이다"

그리고 미나왕은 태평양을 향해 크게 외쳤다.

"나는 골프왕이다, 다, 다"

스토리는 이어졌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공만 차던 한국의 어린이들은 미나왕 우승후
막대기를 들고 골목길을 메웠다.

대통령이나 공무원들도 "국민의 스포츠에 세금이 웬말이냐"며 모든 중과세
를 없앴다.

한국의 2백만 골퍼들은 십시일반 기념모금을 해서 미나왕CC를 만들었다.

미나왕오픈도 창설됐다.

전세계 TV로부터 중계요청이 쇄도, 중계권료만 해도 돈이 남았다.

전세계의 유명프로들도 앞다투어 대회에 참가, 미나왕오픈은 매스터즈를
제치고 세계최고권위의 메이저로 자리 잡았다.


[[[ 후기 ]]]

미나왕은 당신 가슴속의 골퍼이다.

미나왕은 당신을 대신해서 골프의 꿈과 인생의 꿈을 이뤄주고 있다.

미나왕의 도전이 당신의 97년을 한층 강하게 만들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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