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제 작가가 자신의 로봇 그림 ‘해피투게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폐인사랑협회 제공
황성제 작가가 자신의 로봇 그림 ‘해피투게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폐인사랑협회 제공
지난 2일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 갤러리에서 만난 ‘수호신 해치’는 어딘가 몽글몽글했다. 최근 민화 분야에서 가장 각광받는 신진작가로 꼽히는 김병윤 씨(23)는 “해치는 어린 수호신입니다. 점도 있고, 뿔도 있다”며 해치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했다.

독창적인 그의 민화는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상철 에이블룸아트 대표는 “형태와 색감도 뛰어나고, ‘바림’(동양화 특유의 부드러운 짙어짐)이 아주 대단하다”고 했다. 김 작가는 예술인이자 자폐인이다. 그의 누나는 “자폐인은 순수함을 잃지 않는 태도가 특징인데, 김 작가의 그림에선 그의 친절함과 미소가 드러나는 것 같다”고 했다.

김 작가를 비롯해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작가 43명은 이날부터 13일까지 ‘세상을 밝히는 명작전’을 연다. 서울시와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주최하는 행사다. 이들은 지난달 2일 ‘세계 자폐인의 날’에도 서울 서소문 천주교성지에서 같은 이름의 전시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4월 전시에 방문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앙코르전 개최를 약속하며 이규재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예술감독 한젬마 씨도 기획에 참여했다.

전시장에는 악어, 로봇 등 자폐인들이 ‘꽂힌’ 대상에 대한 색다른 표현을 담은 그림이 작가당 1점씩 전시됐다. 행사 첫날 작가들은 예상치 못한 솔직함으로 관람객을 미소짓게 했다.

김병윤 작가의 작품 ‘수호신 해치’는 용맹하기보다는 순수함이 도드라진다. 자폐인사랑협회 제공
김병윤 작가의 작품 ‘수호신 해치’는 용맹하기보다는 순수함이 도드라진다. 자폐인사랑협회 제공
악어, 코끼리, 고래, 코뿔소, 기린 등 덩치가 큰 동물을 주로 그린 김수광 작가(23)는 관람객이 “(작품 속) 악어는 뭘 좋아하나요”라고 묻자 “(잡아먹을 수 있는) 초식동물을 좋아하겠죠”라고 당연하다는 듯 답해 행사장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김 작가는 자신의 작품 ‘배고픈 악어2’에 대해 “손으로 물감을 찍어 바르는 마티에르 기법을 썼다”며 “악어는 사람들에겐 무서운 동물이지만, 강한 턱으로 먹이를 먹고, 공룡과 닮았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런 동물들이 “든든한 수호신이고 소중한 친구 같은 존재라 그림 소재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전작 ‘배고픈 악어1’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소장돼 있다.

자폐인은 특정 생물, 사물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사례가 많다. 오랫동안 하나의 대상을 관찰했기 때문에 가능한 세밀함과 과감한 색감 등이 특징이다. 현대미술이 강조하는 개성적인 표현력을 타고난 이들이다.

윤진석 작가(26)에게 시계는 순간의 기록이다. 콜라주 작품 ‘기억 속 시계들’ 속 시계 수십 개는 모양과 가리키는 시각이 제각각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방문한 식당, 상점, 여행지를 차곡차곡 기억했다가 표현한다. 윤 작가는 “요즘엔 시계를 잘라 붙이는 작업을 좋아한다. 작가 윤진석을 응원해달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황성제 작가는 제각기 다른 형태와 세밀한 치수로 기록된 로봇 설정 파일첩만 수십 권, 총 1만 개의 ‘로봇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에 걸린 작품 ‘해피 투게더’는 설정이 제각각인 로봇 수백 개를 모은 작품이다. 그는 “(로봇들이 서로)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자폐인 작가의 엄마로서 예술감독 한젬마 씨와 전시를 공동 기획한 김은정 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정책위원은 “자폐인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는다는 점에서 큰 예술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에선 자폐성 작가들의 작품이 ‘아르 브뤼(art brut·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장르로 분류되는데, 한국에선 아직 초기 단계”라며 “이들이 ‘가족 매니저’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폐인 아이의 아버지로서 행사에 참여한 김형두 대법관은 “작가들이 이토록 내면의 아름다움을 멋있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더욱 많은 사람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며 “엄마 아빠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우리 둘째 아이도 언젠가 자기의 영혼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될 날을 우리 부부는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