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22주기를 맞아 범(汎)현대 일가가 한자리에 모였다.20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가 가족들은 정 명예회장의 22주기를 하루 앞둔 이날 오후 7시께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그의 옛 자택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이 자리에는 정 명예회장 아들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손자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대선 HN 사장, 정기선 HD현대 사장, 며느리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이 참석했다.정의선 회장 부인 정지선 씨와 정대선 사장의 부인인 노현정 KBS 전 아나운서 등 현대가 며느리들도 참석했다. 이들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옥색 한복'을 차려입고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현대가 며느리들이 한복을 입은 이유는 '제사' 의복이어서다. 이는 생전 공식 석상에 늘 한복차림이었던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의 영향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또한 '현대가 며느리 7계명'에는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마라", "조심스럽게 행동하라", "언제나 겸손 하라", "남녀불문 제삿날에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참석하라" 등의 내용이 담겨있기도 하다.그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확산으로 참석자별 시간대를 나눠 차례로 제사를 지냈지만, 이번에는 전원이 함께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한편 정 명예회장의 추모와 관련, HD현대는 21일 판교 글로벌R&D 센터에서, 현대중공업은 울산 본사에서 사내 추모행사를 열 예정이다.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
15일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앞 광장. 검정 정장을 차려입은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36)가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악기를 들었다. 그렇게 연주된 곡은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 중 ‘명상’. 애수에 찬 서정적인 선율이 오로지 바이올린의 가냘픈 현 한 줄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 음 한 음에 애절한 감정을 쏟아내는 그의 연주를 듣던 군중들은 곳곳에서 흐느꼈다. 목과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북받치는 감정을 삼켜내던 신지아는 연주를 마친 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토해냈다. 세계 무대에 진출한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평생의 스승을 떠나보내는 제자의 배웅이었다.이날은 사흘 전 별세한 ‘한국의 바이올린 대모(代母)’ 김남윤 한예종 명예교수의 발인일. 경희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1993년 한예종 음악원 창설 멤버로 합류하면서 40여 년간 후학 양성에 힘쓴 고인의 추모식 소식에 300여 명의 음악가가 한예종 앞에 모였다. 김대진 한예종 총장, 이강호 음악원장을 비롯해 ‘김남윤 사단’이라 불리는 그의 제자들이 자리를 채웠다. 신지아, 임지영 등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연주자부터 김현미, 백주영, 유시연 등 중견 교수들까지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는 정준수, 양고운, 김현아, 이경선을 포함해 신아라, 고(故) 권혁주, 클라라 주미 강, 장유진, 양인모 등 최근 국제 콩쿠르 수상자까지 셀 수 없이 많다.추도사를 위해 마이크 앞에 선 김대진 총장은 “비통하고 황망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삼킨 그는 “선생님을 보며 어떤 선생이 돼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릴 때면 지친 날에도 다시 정신을 차리곤 했다”며 “학생의 발전을 위해 무섭게 질책하시고는 곧바로 제 방에 들어와 끝없이 우시던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라고 했다.울먹이는 목소리를 몇 번이고 다듬던 그는 “김남윤 선생님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한예종 음악원의 위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퇴임 후에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생애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셨다”고 말했다.추도사가 끝난 뒤 한예종 앞 광장부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까지 헌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운구 차량은 예정 시간보다 20여 분이 지나서야 서초동을 나설 수 있었다. 밥을 굶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거르는 법이 없었고, 학생들의 발전을 위해서는 호랑이 선생 역할도 마다하지 않던 김남윤 교수. 그는 그렇게 동료와 제자들의 눈물 바람 속에서 홀연히 자연으로 돌아갔다.서울예고와 미국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고인은 1974년 세계적인 권위의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2001년 한국인 연주자로는 최초로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초빙됐다. 이후 파가니니 콩쿠르,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 국제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도맡았다. 그의 연구실에는 수십 년간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연습을 하루 거르면 자신이 알고, 이틀 빠지면 비평가가 알며, 사흘 안 하면 청중이 안다.”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