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금이 훨씬 많은 캐피털사가 소규모 중소기업과 대출 알선 계약을 맺으면서 ‘소개해준 기업이 기한 내 상환을 못하면 알선기업이 대출금을 떠안는다’는 조건을 달았다가 계약 무효 판결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불공정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민법에 위배된다는 판단이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수산물업체 A사가 금융업체 B사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사와 B사는 2014년 대출업무 위탁 계약을 맺었다. A사가 수산물담보대출상품 이용자를 B사에 알선해주면 B사는 대출금의 1%를 이용자로부터 받아 0.5~0.8%를 A사에 수수료로 주는 조건이었다.

누구에게 대출해줄지 결정할 권한은 B사에 있고, A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대출 이용자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할 경우 상환할 책임도 A사에 부여한다는 점이 특히 문제가 됐다. A사는 대출 때마다 연대보증을 서야 했고, 상환 기한이 넘어가면 대출금을 대신 갚고 담보를 매입해야 했다.

실제로 A사는 대출금을 갚지 못한 업체들 대신 B사에 원리금 10억7300만원을 대신 갚았고, 1억5800만원의 창고보관료도 지급했다. 결국 A사는 “고의·과실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연대보증과 담보물 인수 책임을 부담하도록 하는 등 거래상 지위를 남용했다”며 B사를 상대로 약 6억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A사의 손을 들어줬다. B사가 A사에 비해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법원은 “A사는 계약 체결 직전 설립된 반면 B사는 이미 17년 정도 존속한 상태였던 점은 물론 자본금도 A사의 약 4500배에 달한다”고 했다.

민법 103조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원고는 각 대출약정의 체결 여부와 그 내용에 관여할 아무런 권한이 없지만, 이용자의 채무불이행에 따른 연대보증채무·대위변제의무·담보매입의무까지 사실상 강제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원고는 부당하게 과도한 부담을 지게 된 반면 피고는 부당하게 과도한 이득을 얻게 됐으므로, 민법 103조에서 정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해 무효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