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지법 4·3 재심 재판부 초대 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 이임
"2021년 3월 335명 무죄 선고한 날 가장 기억에 남아"
"폭삭 속앗수다" 4·3 수형인 1천여명에 무죄 선고한 판사
"70여년간 한을 품고 사셨잖아요.

공적인 자리인 재판정에서 말씀하시면 한이나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어지시지 않을까 했어요.

"
제주지법 4·3 재심 전담 재판부 초대 재판장인 장찬수 부장판사는 7일 제주지법 대회의실에서 진행한 이임 인터뷰에서 4·3 재심 재판에서 유족들에게 시간 제한도 없이 발언 기회를 준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장 부장판사는 4·3 재심 사건을 다루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21년 3월 16일 종일 재판을 진행해 4·3 수형인 335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던 날을 꼽았다.

그러면서 "그 외에도 유족, 혹은 기적적으로 생존한 수형인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순간순간이 모두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 부장판사는 2020년 2월 제주지법에 와 제2형사부 재판장으로 근무하며 4·3 재심 사건을 맡아왔으며, 이후 2022년 2월 신설된 4·3 재심 전담 재판부(형사4-1부, 4-2부) 초대 재판장을 맡았다.

지난 3년간 그가 맡은 재판부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한 4·3 희생자만 1천여명에 달한다.

장 부장판사는 오는 20일자로 광주지법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음은 장 부장판사와의 일문일답.
-- 제주에서 3년간 근무하며 4·3 재심 사건을 담당해왔다.

▲ 4·3 재심 업무를 맡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스스로 4·3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도 부족한 상태였기에 부임 후 300명이 넘는 군사재판 수형인에 대한 재심 청구서가 접수됐을 땐 너무 막막했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고, 법정에서 직접 가슴 아픈 사연들을 접하면서 재판의 방향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부가 공식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를 비롯해 '4·3, 그 진실을 찾아서', '4·3은 말한다' 등 책을 많이 읽었다.

소설 순이삼촌과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등 예술작품들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많은 도움이 됐다.

앞으로도 군사재판 수형인과 일반재판 수형인까지 재판받을 분이 3천명 이상 남은 상황에서 그 업무를 더는 수행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재판의 성과를 바탕으로 후임 재판장이 더 잘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3년간 4·3 재심 업무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폭삭 속앗수다" 4·3 수형인 1천여명에 무죄 선고한 판사
--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 지난 2021년 3월 16일 하루에 이뤄졌던 군사재판 수형인에 대한 본안 재판이 아닐까 한다.

하루에 20건의 사건, 300명이 넘는 피고인들에 관한 재심사건을 20분 단위로 본안 기일을 나누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어서 재판한 날이다.

사건 규모뿐 아니라 그 많은 사람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서 법적으로 조금이나마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외에도 유족, 간혹 기적적으로 생존한 수형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순간순간이 모두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그럼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 크게 두 가지 점이 어려웠다.

우선 과거 재판 기록이 온전히 보전돼 있지 않아 재심 절차에서 문제 되는 세세한 쟁점에 관해 판단하기가 어려웠는데, 그 일례가 전임 재판부에서 했던 공소기각 판결과 달리 무죄 판결을 선고할 때였다.

결론을 내릴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또한 재심은 이념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절차가 아니다.

재심 절차는 오로지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재심 사유가 있는지, 혹은 전부개정된 4·3특별법 취지대로 희생자 결정이 이뤄지면 재심 개시 결정을 해야 하는지 법대로 판단하는 절차다.

이념의 관점에서 4·3을 바라보려는 시각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법대로만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 유족들에게 시간 제한도 없이 발언 기회를 준 이유는.
▲ 우선은 4·3 재판 기록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놓기 위해서다.

또한 연좌제에 걸릴까, 자식 손자 앞길에 피해가 갈까봐 말하지 못한 한이 70년 넘게 켜켜이 쌓였을 거다.

공적인 자리인 재판정에서 말하면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어지지 않을까 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발언 후 속이 후련하다고 하시는 분도 있고, 목이 메 말을 못 하겠다는 분도 있었다.

-- 제주에서 지내며 좋았던 점은.
▲ 아내가 제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해서 지원했다가 덜컥 발령이 났다.

제주에서 지내며 가장 좋은 것은 풍광이다.

바닷가, 중산간, 산간 할 것 없이 풍광이 좋지 않은 곳이 없다.

다만 특별한 업무를 하다 보니 드는 생각이 올레길을 걷다 보면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등 곳곳이 70여년 전 학살터였던 곳들이다.

전국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예쁜 풍광을 보며 사진도 찍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곳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적 피해의 장소였다는 점을 알리는 교육도 이뤄졌으면 한다.

"폭삭 속앗수다" 4·3 수형인 1천여명에 무죄 선고한 판사
-- 4·3특별법에 명시된 재심 관련 조항 중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 4·3특별법 전부개정을 통해 군사재판에 관한 직권재심 및 희생자 결정을 받은 분들에 관한 특별재심 등을 도입해서 진실 규명과 희생자·유족 명예회복에 큰 진전을 이뤘다.

다만 재심 관할권이 제주지법에 있다고 하는데, 희생자 결정을 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규정이 모호해 불필요한 논쟁의 여지가 있어서 보완이 필요하다.

4·3은 제주에서 일어난 일이며, 당시 재판 인력 부족으로 일부 수형인은 육지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타 지역 법원은 사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법 취지에 따라 4·3 재심은 제주에서 하는 것이 맞다.

또한 일반재판 수형인에 관해서는 아직도 직권재심에 관한 규정이 도입돼있지 않아 이 부분도 명시적 입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일반재판과 군사재판을 따지지 않고 직권재심과 청구재심에 관한 관계 설정을 위한 조문을 도입하는 것이다.

직권재심은 청구재심을 막는 취지가 아니라 희생자와 유족의 신속한 권리구제를 위해 국가의 의무로 도입한 절차다.

따라서 희생자와 유족은 재심절차에 있어 국가의 원조를 받을 수 있는데, 이는 직권재심에 있어 명확한 권리구제의 기준과 그 절차의 도입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기준과 절차에 대해 희생자나 유족에게 자유롭게 그 정보를 열람하고 공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나아가서는 유족이 없어서 희생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수형인에 관한 직권재심에 있어서도 위와 같은 기준과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

-- 4·3 희생자와 유족에 하고 싶은 말은.
▲ 제주에서 3년 살면서도 제주말에는 능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제주말로 해보겠다.

제주에 와서 동네마다 곹은 날 식게칩이 하다(제삿집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까지 가심 아픈 것도 용서헤사 시처진다(가슴 아픈 것도 용서해야 씻어진다)는 말로 오랜 세월을 살아낸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모두를 위해 혼디 모영 고치 가보게(함께 모여 같이 가봅시다)라는 말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 폭삭 속앗수다(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