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에 홍수까지 덮쳐…학교·병원도 '와르르'
아파도 병원 못 가고 거리로 내몰려…도시 곳곳 빈민 텐트촌
[르포] 파키스탄 어린 생명들 사납게 할퀸 대홍수
"너무 무서웠어요.

비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망 다녔어요.

친구들도 모두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어요.

"(11세 파키스탄 소년 칼루한)
재난은 가장 약자를 향해 가장 무자비하게 발톱을 드러낸다.

지난해 여름 파키스탄 신드주(州)에서 일어난 대홍수는 도시 외곽에 사는 가난한 이들, 그중에서도 어린이에게 더 가혹했다.

1천700여명의 사망자 중 3분의1이 넘는 645명이 어린이였다.

현지시간 1일 찾은 신드주 우메르콧시(市) 인근 작은 마을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저지른 기후 파괴의 대가를 온몸으로 치르고 있었다.

"폭우 때문에 읍내로 나가는 도로가 넉 달간 끊겼어요.

임산부와 아픈 아이를 둔 엄마들은 더위 속에 몇 시간을 걸어서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

"
한 40대 여성은 홍수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전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목이 말라 오염된 물을 먹은 아이들이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고개를 떨궜다.

신드주에서만 1천곳 이상의 병원이 홍수 피해를 봤고, 병원으로 이어지는 도로들도 파괴됐다.

지역 어린이들은 각종 수인성 질병과 말라리아, 뎅기열, 독감을 제대로 된 치료 없이 견뎌야 했다.

[르포] 파키스탄 어린 생명들 사납게 할퀸 대홍수
아이들의 영양 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이날 만난 아이 대부분은 충분히 먹지 못해 실제 나이보다 많게는 서너 살 어려 보였다.

자신을 열두 살이라고 소개한 한 소년은 또래의 우리나라 어린이와 비교하면 키가 한 뼘쯤은 작고 마른 몸집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듯 몸 이곳저곳을 쉴 새 없이 긁는 아이도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각종 쓰레기와 가축 분변이 나뒹구는 흙길을 맨발로 뛰어다녔다.

아침에는 기온이 10도 정도로 쌀쌀한 데도 겉옷조차 없는 아이가 태반이라고 현지 관계자는 전했다.

도시라고 해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구 1천600만명의 대도시 카라치와 신드주의 옛 주도 하이데라바드에서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대낮에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홍수 이전부터 파키스탄 어린이 절반가량이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홍수로 학교 약 2만 곳이 무너지는 바람에 학교에 가기 어렵게 된 탓이다.

국가 부도를 코앞에 둔 사상 최악의 경제난은 아이들을 더 빠르게 학교 밖으로 몰아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 임시교육센터라도 없는 마을에는 태어나 학교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이가 대다수다.

아이들은 학업 대신 생계에 뛰어들었다.

[르포] 파키스탄 어린 생명들 사납게 할퀸 대홍수
차를 타고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쓰레기장을 지나다 보니 한 남자아이가 모래바람을 맞으며 막대기로 쓰레기를 뒤지는 모습이 보였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혹시라도 돈이 될만한 것은 없는지, 먹을 만한 음식이 버려지지는 않았는지 찾는 듯했다.

또 다른 남자아이는 도로 중앙선까지 나와 운전자들에게 구걸했다.

30대로 보이는 여성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취재 차량 창가를 툭툭 치고는 손을 내밀었다.

눈에 절박함이 가득했다.

도로 너머로는 거대한 천막촌이 펼쳐졌다.

각종 폐자재와 나뭇가지로 뼈대를 세우고, 버려진 카펫을 여러 장 이어붙여 만든 텐트 수십 동이 모여 있었다.

도심에서 밀려난 빈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신드주 전체에 이런 곳이 허다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아이들은 물론이고 홍수 피해 지역 아이들조차 정부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경제난이 심각한 파키스탄 정부는 이재민을 돌볼 여유가 없어 선진국이나 유니세프 등 구호단체의 도움에만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학교에 가고 배불리 먹었을지도 모르는 파키스탄 아이들은 하루하루 맨몸으로 냉정한 세상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