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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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내내 가족과 같이 밥 먹을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서요. 맛있는 음식 앞에서 시끄러운 정치 이야기, 취업 걱정, 나라 걱정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명절에 밥 먹다가 정말 토할 것 같아요. 직장인 한모씨(32)
사회적 거리두기·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방역 해제 후 처음으로 맞는 설 명절에 한 씨와 같이 가족과의 식사 자리가 부담스럽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여야 격돌이 극심해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경기 침체 분위기 속 세대 간 의견 충돌이 잦아진 탓이다.

"빨리 밥 먹고 카페로 대피할 겁니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모씨(34)는 최근 부쩍 나라 걱정을 한다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 사태로 내내 건강 걱정이 컸던 만큼) 서로 건강하게만 살자고 응원했는데, 요즘에는 정치가 이렇다 저렇다, 경제가 엉망진창이다 등 잔소리가 심해지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시는데, 언성이 서로 높아질까 무서워 동조하지 않아도 다 맞는 말씀이라고 해드린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평소엔 정말 좋은 아버지인데, 밥 먹으면서 정치 이야기를 더 하신다"며 "이번 명절에는 최대한 빨리 먹고 일이 밀렸다고 말씀드린 후 집 밖 카페로 대피해야겠다는 전략을 구상 중이다"고 전했다.

부모 세대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30대 직장인 아들을 둔 박모씨(62)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 해야 하는데, 이따금 잊고 또 하게 된다"고 푸념했다. 그는 "특히 정치에 있어서 아들과 의견이 다르면 불편한 건 사실"이라면서 "어차피 내 이야기 안 들어준다고 투표장까지 따라가서 누구 찍는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싶은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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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부부와 정치적 견해가 커 고충이 크다는 최모씨(67)는 "원래 정치나 경제 등 세상 이야기하는 걸 즐기는데, 과거 명절에 자식들이랑 밥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 한번은 아들이 화를 내더라"고 전했다. 그는 "사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이렇다'면서 점잖게 의견이 공유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식사 자리가 불편하기 일쑤"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실제 조선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26~27일 10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4명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식사·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불편하다('매우 불편하다'와 '대체로 불편하다'는 응답의 합)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8~29세에서 35.2%, 60대에서는 47.7%로 대체로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비교적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식사·술자리가 더 불편한 것으로 확인된다.

"취준생들은 더 우울해요"

질문 세례에 방어를 해야 하는 취업준비생이나 학생들은 이번 '설 명절 가족들을 만나기가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취업 때문이다. 최근 경기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고용 시장이 얼어붙을 가능성이 커진 만큼 어른들의 청년 세대 걱정도 불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3년째 구직 중이라는 최모씨(28)는 "'어디 취업 준비하느냐'부터 매년 부모님들과 친척들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면서 "사실 시간일 갈수록 더 힘든 건 나 자신인데 왜 본인들이 더 난리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꼭 그런 걸 또 다른 때는 텔레비전만 열심히 보시다가 밥 먹을 때 되면 하신다"면서 "명절이 제일 싫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우울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취준생 이모씨(27)는 "원래 안 그러셨는데 유독 올해 더 걱정들이 많아지신 것 같다"면서 "친척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답해야 하고, 또 들어줘야 해서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 자취방에서 그냥 혼자 있고 싶다"고 덧붙였다.

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greaterf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