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하와이로 향한 한인들…세계로 뻗어나간 이민 물결
[인천돋보기](22) 이역만리 한인 진출의 역사…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 이민 역사는 120년 전 인천에서 시작됐다.

1902년 인천 제물포에서 배에 오른 최초의 한인 이민단은 이역만리 미국 하와이로 떠나 사탕수수농장에서 폭염 속 고된 노동을 견디며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하와이로 향한 이민의 물결은 세계 각지로 퍼져 오늘날 재외동포 규모는 180개국 총 732만명(2020년 말 기준)으로 확대됐다.

◇ 빈곤 속 결심한 이민…1902년 하와이에 조선인 86명 상륙
우리나라 최초로 공식적인 해외 이민이 시작된 1902년 국내에서는 흉년이 계속되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조선에 진출한 서구 열강의 이권 경쟁으로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94)이 일어나면서 정치 상황은 불안했고 사회 혼란만 커졌다.

일본이 한국에서 쌀과 곡물을 대량 반출하면서 국내 양곡 사정은 악화하기만 했다.

하와이 이민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을 운영하던 미국 회사는 원주민이나 중국인·일본인 노동력을 쓰는 데 한계가 있자 대안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원했다.

처음에 낯선 이국땅으로 향하는 데 부정적이었던 한인들을 설득하는 데는 인천 내리교회(옛 제물포웨슬리메모리얼교회) 담임 목사 존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존스 목사는 '대한 사람의 미국 이민은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라며 이민을 적극적 권유했다.

결국 1902년 12월 22일 최초의 한인 이민단 121명은 미국 땅 하와이로 가기 위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는 일본 기선에 몸을 싣는다.

존스 목사의 영향으로 이민단의 절반 이상은 개신교인으로 구성됐다.

이들 중 일본에서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은 다시 이민선 게릭호에 옮겨 타고 1903년 1월 12일 하와이에 도착한다.

16명은 질병으로 송환 당하고 86명이 최종 상륙 허가를 받는다.

이들은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협궤 열차에 올라 오아후섬 와이알루아 농장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10일 "갤릭호를 탄 102명 가운데 86명이 인천 거주자였다"며 "개항을 통해 신문물과 신종교를 처음 접한 인천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천돋보기](22) 이역만리 한인 진출의 역사…한국이민사박물관
◇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이민 생활…세계로 뻗어나간 한인들
공식 이민이 시작된 뒤 1905년까지 하와이로 향한 한인은 64차례에 걸쳐 7천400여명으로 늘어났다.

하와이 정부는 '하와이 기후는 온화해 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모든 섬에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않는다'며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하지만 사탕수수농장에 배치된 이민자들은 기대와 달리 뜨거운 햇빛 아래서 관리인의 감시를 받으며 힘든 노동을 견뎌야만 했다.

농장에서 일과는 새벽 4시 30분 기상 사이렌으로 시작됐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단 30분의 점심시간을 빼고 하루 10시간을 꼬박 일해야 했다.

무더운 태양 아래서 호미와 괭이로 온종일 작업했고 억센 수숫대를 칼로 잘라냈다.

허리가 아파 잠시 일어서면 말을 탄 감독이 가죽 채찍을 내리쳤다고 한다.

한 달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던 방고(신분증) 번호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하루 품삯은 50∼80센트 수준에 불과했다.

한인 이민자들은 이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하와이에 온 한인 7천400여명 가운데 4천400명은 현지에 남고 2천여명은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나머지 1천여명은 조국으로 돌아갔다.

[인천돋보기](22) 이역만리 한인 진출의 역사…한국이민사박물관
미국 본토로 간 한인들은 캘리포니아나 뉴욕에 정착해 농사일·채소판매·식당일 등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개척했다.

1900년대 한인들의 이민 대상지는 미국 외 다른 국가로도 확대된다.

1905년에는 이민중개인에 속아 한인 1천33명이 멕시코로 불법 노동 이민을 떠났다.

이들은 30여개 에네켄(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4년간 불볕더위 속 강제노동을 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국내에 살기 어려워진 한인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 등지로도 건너갔고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일제 탄압을 피하려는 한인들이 대거 중국 만주로 이주하면서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약 210만명의 한인이 이곳에 거주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해외에 입양되는 전쟁고아도 많았다.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도 이민을 떠났다.

1962년 해외이민법이 제정된 뒤에는 삶의 질을 높이려는 한인들이 세계 각국으로 향했다.

드넓은 황무지가 있었던 남미 브라질·파라과이·아르헨티나로는 농업 이민 행렬이 이어졌다.

독일로 떠난 약 8천명의 광부와 1만명의 간호사는 독일 사회에서 근면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이영근 재외동포재단 기획이사는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굶주림에서 벗어나려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민을 떠난 동포들이 많았다"며 "1960년대에 들어서는 보다 나은 미래를 찾아서 개척자 정신으로 해외로 나갔고 대부분 성공하셔서 모국 대한민국과의 상생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인천돋보기](22) 이역만리 한인 진출의 역사…한국이민사박물관
◇ 고국 독립·발전에 발 벗고 나선 이민자들
한인 이민자들은 해외에서도 고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이민자들은 제1차 한인 회의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대외에 널리 알렸다.

3·1 독립운동 이후 미주 한인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승만·안창호·박용만 등은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하와이 이민자들은 고국의 공업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15만 달러를 고국에 보내 인하대 개교에 큰 도움을 줬다.

인하대는 1954년 4월 인하공과대학으로 설립된 뒤 1971년 종합대학인 인하대학교로 승격됐다.

하와이 한인들의 뜻을 기려 인천의 인(仁), 하와이의 하(荷)를 교명으로 쓴다.

해외 이민의 출발지인 인천에는 재외동포의 활약상을 기리고 발자취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2008년 한국이민사박물관이 건립됐다.

월미도에 있는 박물관에는 한인들이 이민 생활 때 실제 사용했던 물건이나 이민자 명부, 과거 생활상이 담긴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하와이나 멕시코 초기 이민자들이 현지에서 사용했던 장비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박물관 관람료는 무료이며 하루 3차례 문화관광해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매주 월요일에는 휴관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