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출동' 권영중 소방위 "다시 마주한 현장서 가슴 찌르는 통증"
"소방관 트라우마 치료 위해 전문 심리상담센터 필요"
[참사 한달] ③"소방관 퇴직해도 그 얼굴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그에게 열 번도 부족했다.

권영준(51) 소방위의 무표정한 얼굴은 오히려 그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증폭하는 듯했다.

생과 사를 가르는 현장을 누빈 20년차 베테랑 소방관에게도 10월 29일은 퇴직할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새겨져 버렸다.

"젊은 청춘들이잖아요.

그들에 대해 안타까움은……퇴직 때까지, 퇴직 이후까지도 계속 남을 것 같아요.

"
권 소방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어날 수 없는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전쟁터처럼 시민 수십, 수백 명이 대로에 눕혀진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사 한달] ③"소방관 퇴직해도 그 얼굴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 끝없는 심폐소생술…'비현실적인 공포'의 그날 밤
중부소방서 소속인 권 소방위는 참사 당일 오후 10시 20분쯤 질서유지와 인원통제 임무를 받고 이태원으로 출동했다.

평소 7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태원로를 가득 메운 차량과 인파를 좀처럼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후 10시 45분께 도착한 해밀톤호텔 골목 바닥엔 이미 심정지 환자들이 여기저기 눕혀져 심폐소생술(CPR)을 받고 있었다.

'저기 아직도 (환자가) 쌓여 계시다'며 울먹이는 동료 대원, 눈에 보이는 대로 CPR을 해도 계속 쏟아져나오는 심정지 환자들,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들어 옮긴 뒤 CPR을 돕다가 지쳐가는 시민들.
눈에 들어오는 광경 모두가 비현실적이어서 공포마저 엄습했다고 한다.

이미 첫 신고 후 30분이 지나 심정지 환자를 되살릴 골든타임 5분을 한참 넘겼지만 권 소방위는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싶어 닥치는 대로 CPR을 했다.

권 소방위는 "환자를 모셔다 놓고 (참사가 발생한 골목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며 "CPR하는 시민들도 점점 힘에 부쳐갔다"고 떠올렸다.

"힘들겠다는 예감이 왔어요.

구조가 필요한 환자가 적었다면 10∼20분만에 상황이 종료됐을 텐데, 환자는 계속 나오고…"
[참사 한달] ③"소방관 퇴직해도 그 얼굴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 "어떻게 그 얼굴 잊을 수 있겠습니까"
소방대원들은 보통 현장에서 복귀하며 서로에게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함께 출동한 대원들은 아무도 이태원 참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날 밤 그 공간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권 소방위가 소생시키려 애쓴 심정지 환자는 15명 정도였다.

그중 3명의 얼굴은 계속해서 떠오른다고 했다.

권 소방위는 "처음 마주친 분들은 여성 두 명과 외국인 남성 한 명이었다.

그분들 얼굴이 간간이 떠오른다"며 "이후로는 너무 많이, 맥을 짚어볼 새도 없이 CPR을 했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는 어느새 소방관들의 일상을 잠식했다.

권 소방위는 참사 일주일 뒤 업무를 위해 동료와 함께 이태원119안전센터에 갔다.

현장을 한 번 더 살펴보자는 생각에 해밀톤호텔 옆 골목으로 향했다.

그 골목 입구를 마주한 순간 갑자기 어지럽고 가슴에 통증이 왔다.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참사 한달] ③"소방관 퇴직해도 그 얼굴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면서 가슴이 너무 아파왔습니다.

말 그대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습니다.

동료에게 둘러보고 오라고 하고 현장에서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
얼마 전 우연히 차를 타고 이태원로를 지나던 경험도 떠올렸다.

권 소방위는 "차량이 사고 발생 장소로 다가간 순간 해밀톤호텔 골목 쪽을 보지 않도록 손으로 눈을 막았다"며 "아예 그쪽을 못 보겠더라"라고 말했다.

스스로 무던한 편이라는 권 소방위는 참사 이후 가정 내에서나 친구에게 갑작스럽게 욱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등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그는 "마음이 아픈 게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하던 술을 참사 이후 3주 동안은 매일같이 마셨다.

뉴스에 유족이 나와 울음을 터뜨리거나 누군가와 이태원 참사 이야기를 나누면 참사 현장이 무한 반복됐다.

그는 "마음이 편치 않은데 술이라도 마셔서 편히 자려는 생각에 한동안 비번 때마다 술을 마셨다"고 털어놨다.

비극은 곳곳에,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동료 소방관의 딸이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조문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장례식장에 가려다가 참혹한 기억 탓인지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참사 한달] ③"소방관 퇴직해도 그 얼굴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 또다른 의미의 '피해자' 소방대원
비단 권 소방위뿐 아니다.

소방관들이 모이는 온라인 게시판에는 최근 이태원119안전센터 소속 직원의 글이 큰 공감을 얻었다.

밤마다 순찰하는데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돌아보는 게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권 소방위는 퇴직한 선배의 경험담을 꺼내며 이태원 참사가 남긴 트라우마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 버금간다고 말했다.

그 선배는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철근에 찔려 울부짖던 한 여성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철근을 절단하면 사망할 것이라는 판단에 다른 이들을 먼저 구조한 선배는 살려달라는 여성의 절규를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다.

그는 "소방관의 경우 트라우마가 조금씩 쌓이다가 개인적으로 힘든 사정이 생기면 우울증 등으로 급격히 악화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 소방위와 함께 출동했던 대원들은 모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상담이나 치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업무인 까닭에 굳이 치료받을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고 스스로 마음먹기 때문이다.

충분하지 않은 심리 상담 지원마저도 소방관들이 PTSD를 방치하는 이유다.

권 소방위는 "참사 이후 상담사가 직접 찾아왔을 때는 출동과 사무실 행정업무 등으로 바빠 상담을 받을 수 없었다"며 "이후 상담을 신청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지금처럼 외부 병원이 협력하는 방식 대신 소방관 심리상담을 전담하는 조직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태원에서 참사를 몸으로 겪어야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비극의 현장을 마주쳐야 할 소방대원들도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