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물가상승률 사상 최고치…독일은 70여년 만에 최고
에너지난·인플레에 유럽 곳곳 시위·파업…정치불안 우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에너지 대란이 물가를 급격히 밀어 올린 여파로 유럽 곳곳에서 시위와 파업이 잇따르면서 정치불안이 커지고 있다.

AP통신은 22일(현지시간) 런던발 기사로 이런 상황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행동을 요구함에 따라 정치지도자들이 지는 위험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평가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섣부른 경제계획으로 금융시장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경제난을 심화시키는 바람에 2개월도 안 돼 퇴진할 처지가 된 것이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요즘 유럽 곳곳에서 발생하는 시위와 파업의 배경에는 물가상승으로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의 불만이 있으며, 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현실화할 우려가 있다는 게 AP의 지적이다.

◇ 우크라이나 지지해 온 유럽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 가중 가능성
이번 인플레이션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에 대한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원유 공급이 크게 줄어든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유럽 정치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는 한편, 값싼 러시아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경제체질을 개선하겠다고 했으나, 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시민들의 불만이 유럽이 견지해 온 친우크라이나·반러시아 정책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정치와 사회 불안이 가중될 우려도 없지 않다.

에너지난·인플레에 유럽 곳곳 시위·파업…정치불안 우려
위기관리 컨설팅업체 베리스크 메이플크로프트에서 분석가로 일하는 토르비요른 솔트베트는 AP에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빠른 해결책은 없다"며 "내년에는 인플레이션이 올해보다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에 따라 경제적 압박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유럽의 여론 사이의 관계가 "심각한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솔트베트는 올해 10월 유럽의 날씨가 예년보다 온화해서 난방용 가스의 수요가 줄어든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며 "만약 이번 겨울에 예기치 않게 유럽에서 가스 공급에 지장이 생긴다면, 소요와 위험과 정부 불안정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급격한 물가상승과 에너지 품귀 등 경제난이 심각해지면서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고 러시아로부터 가스와 석유를 공급받자는 극단적 선동 정치인에 휘둘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 유럽 인플레이션 잇달아 사상최고 기록 경신
유럽의 인플레이션은 최근 몇 달간 잇달아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기준으로 삼는 소비자물가조화지수(HICP)로 따졌을 때 올해 9월의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은 유로를 사용하는 유로존 19개국 평균이 9.9%였고, 이 중 독일은 10.9%에 달했다.

유로존과 독일 양쪽 다 1996년부터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래 사상 최고치다.

또 소비자물가지수(CPI)로 따진 독일의 물가상승률은 10.0%로, 1952년 이래 70여년만에 최고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동독(독일민주공화국)과의 1990년 재통일 이전 서독 시절부터 이 통계를 작성해 왔다.

에너지난·인플레에 유럽 곳곳 시위·파업…정치불안 우려
유럽에서 에너지와 식품 가격이 급등한 계기는 올해 2월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특히 난방과 전력생산에 쓰이는 천연가스, 석유 등과 식품 등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천연가스 가격이 올해 여름의 고점보다는 최근에 조금 낮아졌고 2021년 9월 이래 유럽 정부들이 가계와 기업의 에너지 부담을 덜어두겠다며 5천760억 유로(811조 원)를 배당했으나 생활고로 불만을 품는 유럽 시민들이 여전히 많다.

AP는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섣불리 내놨다가 사퇴의 계기가 된 경제계획에 대규모 감세 계획과 가계와 기업의 에너지 요금을 보조해주겠다는 내용이 포함됐으나 정작 재원 조달 방법은 빠져 있던 점을 지적하면서 "이는 정부들이 처한 진퇴양난의 예"라고 설명했다.

경제가 워낙 어려우니 정부가 돈을 써줘야 하는데, 경제가 워낙 어려워서 정부도 쓸 돈이 없다는 것이다.

◇ 유럽 곳곳 시위·파업 잇따라
프랑스 전역에서는 10만여명의 노동자 등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서 가파른 물가상승과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임금을 올려 달라고 요구하는 행진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또 정유업체 노조 파업에 정부가 개입한 데에도 항의했다.

프랑스는 9월 물가상승률이 6.2%로, 19개 유로존 국가 중에서 가장 낮아 그나마 상황이 가장 좋은 편이다.

영국에서는 물가상승률이 40년만에 최고 수준인 10.1%에 이르렀으며, 물가상승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최근 수개월간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에너지난·인플레에 유럽 곳곳 시위·파업…정치불안 우려
영국의 철도회사 임직원들과 독일 파일럿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면서 항공과 철도 등 유럽의 교통에 연쇄적으로 지장이 생기기도 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유로존에서 인플레이션이 가장 심한 독일에서는 22일 수만명의 시위 참가자들이 물가상승 억제, 화석연료 의존 탈피, 원자력발전소 가동 중지, 빈곤층에 대한 에너지 보조금 증액 등 다양한 주장을 담은 구호를 내세우고 행진을 벌였다.

시위는 독일 수도 베를린과 뒤셀도르프, 하노버,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등 6개 도시에서 열렸다.

주최 단체 중 하나인 그린피스는 참가 인원이 약 2만4천명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베를린 시위에 약 1천800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했다.

시위 주최 단체 중 하나인 독일 통합서비스노조(ver.di)의 안드레아 코치슈 부위원장은 "사회적으로 균형 잡힌" 지원책이 시급하다며 "소득이 적은 사람들은 부유층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베를린 시위에 참가한 울리히 프란츠 씨는 "분배가 보다 더 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지면 좋겠다"며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는 백만장자들도 있지만 그 방면으로는 아무런 움직임이 안 보인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독일 의회는 21일 치솟는 에너지 가격의 영향으로부터 기업과 가계를 보호하기 위해 2천억 유로(282조 원) 규모의 정부 지원책을 통과시켰다.

여기에는 각 가정과 중소기업에게 1개월치의 가스요금에 해당하는 돈을 1회성으로 지급하는 것과, 전기요금 상한제를 올해 3월부터 소급적용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지난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시민 수천명이 모여 정부가 에너지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에너지, 식품 등 필수품의 가격이 너무 심하게 올라서 노동자들이 빈곤에 빠지고 있다면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는 친서방 정책을 펴는 현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EU의 제재에 찬성하는 입장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 참가자들은 에너지 비용이 올라 고통을 겪는 가계와 기업에 정부가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