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근 전 상원의원(오른쪽)과 부인 박영희 시인.
임용근 전 상원의원(오른쪽)과 부인 박영희 시인.
‘오리건의 돈키호테.’

임용근 전 미국 오리건주(州) 상원의원(87·미국명 존 임)을 현지 언론들은 이렇게 불렀다. 입지전적인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별명이다. 그는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잔심부름하는 ‘하우스보이’였고, ‘좌익 연좌제’에 갇혀 취직도 못하는 신세였다.

미주 한인 1세대 가운데 처음으로 상원에 진출한 임 전 의원은 1960년대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에서 사업을 크게 일으켰고 오리건주에서 상·하원 통틀어 5선 의원을 지냈다. 오리건주에 ‘한인의 날’을 법제화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임 전 의원은 18일 서울 인사동에서 자서전 <버려진 돌> 출간 기념 간담회를 열었다.

그는 책을 통해 “실패와 시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한국 청년 자살률이 높아 안타까워요. 세상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많죠. 그러나 지금은 내 가치를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버려져 있더라도 언젠가는 기회가 옵니다. 성경 마태복음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됐다’는 구절처럼요.”

1935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난 임 전 의원도 한때는 ‘버려진 돌’이었다. 6·25전쟁 중에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처형됐다. 소방대장이던 아버지는 인민군 통치 중에도 소방서를 지켰다가 ‘인민군에 협력했다’는 누명을 썼다. 아버지가 그렇게 떠나고 나니 서슬 퍼런 연좌제로 번듯한 직업은 상상도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군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목사를 꿈꾸며 신학교에 갔지만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좌절하는 대신에 매 순간 기회를 찾았다. 임 전 의원은 “미군에게 틈틈이 영어를 익혔고, 폐결핵 투병하는 7년간 영어단어 7500개를 외웠다”고 했다.

교회 행사에서 그의 영어 실력을 눈여겨본 고(故) 로버트 모건 전 한국컴패션(기독교계 국제 어린이구호단체) 대표가 후원아동 중창단의 미국 여행 인솔과 통역을 맡기면서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당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여기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의 유학 생활은 미국 여행 도중에 포틀랜드 신학교 원서를 내면서 시작됐다. 한국에 있던 부인 박영희 시인(84·미국명 그레이스 임)은 돌쟁이 아들을 업고 미국에 갔다.

맨주먹밖에 없던 그는 미국에서 청소부, 페인트공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편의점을 인수해 기반을 닦았고 부동산업 등으로 사업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오리건한인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미주한인회총연합회장 등을 지낸 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92년부터 5선 오리건주 상·하원의원을 지내면서 세제 혜택을 통해 기업을 적극 유치하고 복지 제도를 개혁했다. 한·미 관계에도 공헌했다. 오리건한국전쟁기념재단 명예회장인 그는 연말께 오리건주에 한국전쟁역사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임 전 의원이 미리 정해둔 묘비 문구는 이렇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꿈을 다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꿈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