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1학년 A군은 최근 돌아가신 아버지가 약 1800만원의 빚을 남겼다는 걸 알게 됐다. 미성년자로 소득도, 아버지가 남긴 재산도 없는 그는 어머니와는 세 살 이후 연락이 끊겨 기댈 곳이 없었다. 빚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그를 도와준 건 친척들이었다. 법적 대리인으로 나서 상속포기를 권해준 것이다.

상속포기를 신청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작년 서울가정법원에 접수된 상속포기 신청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데 이어 최근 들어 이 수치는 더 가파르게 늘고 있다. 물려받을 게 빚밖에 없어 상속을 포기하는 제도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장기 불황’의 또 다른 시그널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상속포기 4000건 역대 최대

"부모 빚 물려받기 싫다"…상속포기 역대 최다
3일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2021년도 상속포기 신청은 4106건으로 통계가 작성된 이후 최대치다. 상속포기 신청은 2015년 약 3600건을 기록한 이후 2017년 3249건으로 떨어졌다가 2018년 3793건으로 한 해 만에 약 16.7% 급증했다. 이후 2019~2020년에는 3700건대를 유지하다가 지난해 갑자기 4000건을 넘어서며 폭증했다. 일부 채무만 상속받겠다는 한정승인 신청도 3803건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보다 49건 늘어난 수치다.

상속 시에는 재산·채권(적극재산)뿐 아니라 채무(소극재산)도 물려받게 된다. 이때 소극재산이 적극재산보다 많아 상속권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상속포기다. 한정승인은 상속받은 재산 한도 내에서 피상속인의 빚을 변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려받을 재산이 3억원, 빚이 10억원이라면 재산으로 3억원의 빚을 변제하고 나머지 채무는 상속을 포기하는 식이다.

올해 추이도 심상치 않다.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지난 7월까지 접수된 상속포기는 2650건, 한정승인은 2416건이다. 7월까지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의 64.5% 수준을 기록한 것이다. 이 추세라면 올해도 작년 수치를 넘어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울 전망이다.

‘저소득층 위기’ 시그널

전문가들은 경기 불황의 단면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상속 전문 변호사는 “상속포기는 말 그대로 물려받을 게 빚뿐인 저소득층에서 대부분 나오고 있다”며 “경기가 내리막길을 타면서 저소득층이 더 큰 타격을 받았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에는 상속포기 서류가 간소화되면서 접수 건수가 증폭된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별다른 절차 변경이나 외부적 요인은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나타난 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B씨는 친부모 이혼 이후 아버지와 20년 넘게 연락을 끊고 살았다. 최근 친부의 사망 소식과 함께 빚을 떠안을 처지가 됐다. 일용직으로 일하던 친부가 코로나19 발생 이후로 일감이 끊기면서 월세가 800만원 가까이 밀려 있었다. 사망 후 재산조회를 해봤지만, 친부 앞으로 등록된 어떤 재산도 없는 상태였다. B씨는 이마저도 부담할 형편이 안 돼 상속포기를 신청했다.

상속 전문 변호사들은 상속포기를 선택할 때 빚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후순위 상속자에게 채무가 넘어간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C씨는 이모의 사망 이후 빚을 상속받게 됐다. 이모의 자녀들이 상속 포기 이후 연락을 주지 않아 빚이 사촌인 C씨에게 상속된 것이다.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에게 빚이 상속되고, 멀리는 4촌 이내 친척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관계인 모두가 상속포기를 해야 ‘빚의 대물림’이 사라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