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태 전략 만든 인물'로 평가…미·일·인도·호주 연대도 강조
과거사 갈등·對中 강경책으로 이웃 나라 韓·中선 낮은 평가

2007년 8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 총리는 인도를 방문해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의회에서 연설했다.

[이슈 In] 아베의 또다른 유산…"인도·태평양과 쿼드의 아버지"
아베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면한 국가 간 관계 강화를 의미하는 '2개 대양의 결합'이라는 주제의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하는 '가치관 외교'의 중요성과 함께 미국, 일본, 인도, 호주 등 4개국의 연대 강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특히 "우리는 지금 역사적·지리적으로 어떤 장소에 서 있는가.

태평양과 인도양은 바야흐로 자유의 바다, 번영의 바다로서 하나의 역동적인 결합을 가져오고 있다.

전통적인 지리적 경계를 뚫고 나가는 '확대 아시아'가 명료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외교무대에서 일반명사처럼 자주 사용되는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과 미국, 일본, 인도, 호주의 4개국 안보 협의체 쿼드(Quad)의 태동을 알리는 중요한 연설이었다.

◇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 제시…美 설득해 실행
지난 8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서 선거 유세 도중 암살당한 아베 전 총리는 국내에서는 강경 우익 성향 정치인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국제무대에서의 평가는 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많은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아베가 오늘날 외교 무대에서 일반화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을 설계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1차 집권기인 2007년 인도 의회 연설에서 '인도양과 태평양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아베는 2차 집권기인 2016년 이를 더욱 구체화했다.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란 전략 개념은 2016년 8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에서 제시됐다.

아베는 당시 TICAD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태평양에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자유와 법치·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장(場)"으로 규정하고, 관련국들이 국제규범에 근거한 인프라 정비와 무역·투자, 해양안보 분야 등의 협력을 추진해나가자고 했다.

[이슈 In] 아베의 또다른 유산…"인도·태평양과 쿼드의 아버지"
아사히신문은 "아베 총리가 힘을 배경으로 동·남중국해에서 자국의 권익 확대를 꾀하는 중국의 강경한 모습과 대비를 이루면서 자신의 새로운 외교전략인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개했다"고 전했다.

이후 아베는 2017년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해 같은 해 11월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양국 공동의 외교 전략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 전략 개념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란 표현은 이제 바이든의 연설에서도 중심이 됐다"며 "미 국방부가 2018년 '미 태평양사령부'의 이름을 '미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바꾼 것도 아베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9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첫 대면 정상회의가 열린 쿼드도 아베의 의지와 추진력으로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쿼드는 2004년 12월 인도양에서 발생한 쓰나미를 계기로 만들어진 미국, 일본, 인도, 호주의 인도적 협력체였다.

2007년 8월 아베가 인도 의회 연설에서 4개국 안보 대화를 제안하고 관련국들이 호응하면서 쿼드가 활성화되는 듯했으나 같은 해 9월 아베가 돌연 사임하고 존 하워드 호주 총리도 그해 12월 실각하면서 쿼드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아베는 집권 2기를 앞둔 2012년 12월 발표한 '아시아의 민주주의 안보 다이아몬드'라는 글에서 쿼드 협력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남중국해가 급속히 베이징의 호수로 변하고 있으며 옛 소련의 오호츠크해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며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4개국이 집단 안보를 통해 부상하는 중국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베와 밀월 관계였던 트럼프가 2020년 8월 미국, 일본, 인도, 호주 등 4개국으로 구성된 안보 협의체를 출범할 뜻을 밝히면서 쿼드가 급물살을 탔다.

이처럼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과 쿼드 구상이 아베의 2007년 인도 의회 연설에서 태동한 만큼 아베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인도에서 특히 높다.

인도 영자지 파이낸셜익스프레스는 8일(이하 현지시간) 아베 전 총리를 "인도·태평양과 쿼드의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이 신문은 "아베 총리 치하에서 일본과 인도는 처음으로 국방·외교 분야 2+2장관 대화를 했고 해양안보, 쿼드, 인프라 분야의 협력을 강화했다"며 "인도는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의 패권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중요한 플레이어로 인식됐다"고 전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일본의 최장수 총리인 아베는 인도·태평양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며 "쿼드의 헌신적인 설계자이기도 한 그는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이고 일본 국민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로리 메드캘프 호주국립대(ANU) 교수는 알자지라에 "역사는 아베 신조를 인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을 만든 가장 중요한 국제적 인물 중 하나로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위기 예방"…韓中에선 평가 엇갈려
아베는 총리 재임 중 인도양과 태평양을 묶은 전략 개념을 제시하고 쿼드를 구체화한 것 외에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안보 위기를 예방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뉴스위크 일본판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안보상의 위기가 아태 지역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베 전 총리의 공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9일 보도했다.

이 잡지는 대인관계 구축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아베 전 총리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취임 직후부터 밀월관계를 지속하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위기가 아시아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집권 초기 미국과 북한 간 전쟁 일촉즉발 위기가 고조되고 이후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아베가 트럼프를 설득해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워싱턴포스트(WP)의 외교·안보 전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아베가 지병을 이유로 총리직을 중도 사임한 후인 2020년 8월 30일 쓴 칼럼에서 "아베는 트럼프의 변칙적인 행동을 관리하는 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였을 것"이라며 "아베가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를 만류했다"고 전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도 같은 날 WP에 기고문을 싣고 "아베는 트럼프·김정은의 황홀경 속에 길을 잃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을 현실과 가까운 곳에 묶어 놓는 무거운 금속 체인과도 같았다"고 했다.

그는 또 "아베는 역내와 그 너머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중국에 맞서는 워싱턴의 '자유롭게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란 구호를 실제로 창시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슈 In] 아베의 또다른 유산…"인도·태평양과 쿼드의 아버지"
이처럼 외교안보 분야에서 업적을 인정받고 있는 아베지만 이웃 나라인 한국과 중국에서의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중국중앙(CC) TV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아베 사망 직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에게 조전을 보내 "아베 전 총리가 재임 중 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유익한 공헌을 했다"고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중국 현지의 일부 상점이 '아베 죽음을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은 현수막을 거는가 하면 소셜미디어에서도 아베의 사망을 환영하고 조롱하는 내용의 글들이 퍼지면서 논란이 됐다.

한국에서도 일부 야당 의원과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아베의 생전 행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의 글들을 소셜미디어에 게재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일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도 "한일 양국의 갈등 조장과 역사 부정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았다"고 비판했다.

일부 네티즌도 트위터 등에서 아베의 과거 위안부 관련 발언 등을 거론하며 그의 죽음을 반긴다는 식의 글을 올리거나 전파했다.

한중 양국 대중의 이런 반응은 아베의 총리 재임 시 과거사 갈등과 대중국 포위망 정책 등으로 양국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아베 전 총리가 그의 2번째 임기에 두 차례 중국을 방문했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일본의 침략 역사 부정을 포함한 그의 언행은 중국 대중 사이에서 나쁜 평판을 형성했다고 비판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의 일부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이 아베의 죽음을 축하하며 그를 전범국가 부정주의의 상징이라고 하는 등 조롱을 했다며 그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반응은 국제적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손상할 위험이 있다고 꼬집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