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완박 법안 처리하려 사보임·탈당…중대 입법 현안 놓고 숙의 '실종'
학계 "안건조정위 강화·법사위 개혁 등 국회법 고쳐야"
'다수의 입법' 항상 옳나…"국회선진화법 사실상 무력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인 검찰청법 개정안이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과정을 두고 국회선진화법이 사실상 무력해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8년 전 제도화한 국회선진화법은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막고 소수당의 의견까지 두루 살피는 숙의를 거쳐 중요한 입법 현안을 풀어가도록 했지만, 검수완박 법안의 처리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은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지양하고 법안을 숙의하기 위해 여야 동수의 안건조정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사보임과 고의적 탈당 등으로 법의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더구나 형사사법 체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법안이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단독 처리를 통해 제도화하면, 미처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던 부작용들이 드러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다수의 입법' 항상 옳나…"국회선진화법 사실상 무력화"
◇ 185석 '밀어붙이기'에 국회선진화법 취지 무색…'꼼수' 비판도
국회선진화법은 이명박 정부였던 제18대 국회에서 친이(친이명박)계가 장악한 거대 여당이 쟁점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속도전에 나섰다가 20일간 민주당과 '입법전쟁'을 펼친 것을 계기로 탄생했다.

2008년 12월 여당의 부자 감세 예산안 처리, 한미 자유무역협정 동의안 일방 상정에 이어 2009년 7월 미디어법 통과, 2010년 1월 4대강 사업 예산 강행 처리 등 다수당의 밀어붙이기식 입법이 정치 실종을 낳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던 때다.

이런 배경으로 2014년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됐지만, 이번 검수완박 법안을 둘러싼 여야 간 대치와 검찰청법 개정안의 단독 처리 과정은 18대 국회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하게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에서 원내 절대 과반인 180석을 얻었다.

현재는 171석이지만 검수완박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우군을 더 끌어모을 수 있었다.

민주당 출신 무소속 6석에 법안 표결에 찬성 입장을 밝힌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 정의당 6석 등이다.

모두 모으면 본회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종결권인 180석을 훌쩍 넘겨 185석이 된다.

필리버스터와 신속처리안건 지정(패스트트랙) 등은 원내 소수정당과의 합의를 끌어내도록 유도하는 국회선진화법의 견제 장치이지만, 한 정당이 5분의 3 이상 의석수를 확보하면 작동 불능 상태가 된다.

여기에 민주당이 검수완박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직행시키기 위해 법사위에 사실상 민주당 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소속 의원을 잇달아 배치했던 점도 국회선진화법의 빈틈을 노린 행태로 지적된다.

특히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법사위로 사·보임된 민주당 출신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돌연 검수완박에 반대 의견을 내자 민형배 의원이 갑자기 민주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이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민 의원이 무소속으로 안건조정위에 참여해 사실상 민주당과 동일한 의견을 내자 소수당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열린 안건조정위도 17분 만에 끝났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일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는데도 '폭력국회', '동물국회'라는 말이 나와서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됐던 것"이라며 "그런데 민 의원이 안건조정위에 편법과 꼼수로 들어가 통과시킨 것,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의장 중재안을 받았다가 파기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수의 입법' 항상 옳나…"국회선진화법 사실상 무력화"
◇ "중대 현안, 숙의 없이 입법 땐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 유발"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에도 '졸속입법'으로 비판받은 사례는 수두룩하다.

이번 검수완박 법안처럼 정치적인 득실을 고려해 여당이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경우도 있지만, 여론이 들끓는 사건·사고 발생 시 규제 입법을 서두르는 경우도 많았다.

2020년 여당 주도로 통과한 주택임대차보호법과 부동산거래신고법 개정안은 정책 목적과 반대되는 결과를 불러온 과잉규제 법안이라는 비판을 초래했다.

임차인이 임대차 종료 전 일정 기간 내에 계약 갱신을 요구할 경우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하지 못하고 전세보증금은 5% 이상 올릴 수 없도록 했으나, 해당 법이 시행되면서 전세 매물이 급감하고 가격이 오르는 등 서민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밖에도 중대재해처벌법, 공수처법 등도 위헌 시비가 이어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숙의 없는 입법으로 인해 제도의 부작용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되고, 사회적 비용이 된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꼽는다.

정부가 정책을 입법화하기 위해 의원입법이라는 우회 방식을 쓰는 관행도 '졸속입법'의 원인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가 부처 간 이해 조정이 어려운 법안을 의원입법의 형식을 빌어 추진하다 보면 현실성과 타당성 검증 부족, 완성도 미흡, 하위법령 마련의 어려움 등 여러 부작용이 양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묵 교수는 "강행 입법도 안 되지만 졸속입법도 안 된다"며 "특히 검수완박 같은 중요 법안은 최소 몇 달은 숙의하면서 공청회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미국의 경우 웬만한 주제가 아니고서는 당론으로 정해 밀어붙이는 게 불가능해 다수당이 함부로 독주를 못 하는데, 우리나라는 다수당이라 하지만 내부 토론 없이 그냥 당론이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수의 입법' 항상 옳나…"국회선진화법 사실상 무력화"
◇ "무너진 의회주의…국회법 개정할 필요도"
우리 국회는 오랜 세월 숙의보다 밀어붙이기식 법안 처리, 협의보다는 벼랑 끝 힘겨루기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입법 독주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법학교수회는 최근 성명에서 "검수완박법은 헌법 전문과 헌법 정신에 반한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검찰 제도와 사법경찰 제도의 기본정신을 지켜야 한다"며 "국회의원 특권을 폐지하고 각종 입법개혁안도 실행하라"고 촉구했다.

이재묵 교수는 "안건조정위 권한이 더 강화돼야 한다"며 "게이트키퍼이지만 사실상 나눠 먹기이자 '옥상옥'이 된 법사위의 개혁이 필요하다.

본연의 임무만 남기는 게 가장 좋다"고 강조했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국회선진화법을 큰 틀에서 보면 폐지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5분의 3'이라는 기준을 정한 나라가 있느냐"며 "국회선진화법이 국회마비법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힘이 검수완박 법안을 처리한 국회 법사위 안건조정위와 전체회의에 대해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가운데 헌재가 신속히 판단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의 위헌 결정을 확실히 받아내는 게 국회법 개정보다 더 확실하다"며 "국회선진화법을 제대로 지키면 된다"고 했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시 "제도보다는 운용의 문제다.

국회선진화법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다시 개헌론을 언급하기도 한다.

박성병 정치평론가는 "의원입법 우회 등 꼼수는 국회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행정부에 예속되게 하며 무능한 국회를 만드는 행위"라며 근본적으로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벗어나고,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교섭단체를 5개 이상으로 늘려 견제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수의 입법' 항상 옳나…"국회선진화법 사실상 무력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