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5월 첫 기념식, 일제 감시 속 우여곡절 끝에 열려…잡지 등 사료에 기록
"순사들이 눈을 부릅"…100년전 무산될뻔 했던 '첫 어린이날'
"방정환 선생의 연설은 우리들의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놓은 듯했다.

그래서 순사들이 삥 둘러서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
1947년 아동문학가 조풍연(1914∼1991) 씨는 잡지 '주간소학생'에서 1922년 5월 1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당에서 열린 '첫 어린이날' 기념식을 이렇게 회고했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할 만한 행사라면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이 끊이지 않던 시절에 가까스로 열린 첫 어린이날 기념식의 모습이 조씨의 글 속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조씨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삼일 운동이 있은 지 3년밖에 안 되던 해요, 또 일본 놈들이 어린이는 고사하고 조선 사람이면 무슨 핑계를 해서라도 압박을 하려던 때"라고 떠올리기도 했다.

첫 어린이날 행사가 열리기까지의 우여곡절은 다른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30일 방정환연구소에 따르면 1922년 발간된 '천도교회월보' 141호에 첫 어린이날 개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행사는 일제의 방해로 무산될 위기에까지 처했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5월1일 오전 10시부터 시민들에게 선전문을 배포하며 어린이날의 시작을 알릴 계획이었지만 일본 경찰의 검열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혔다.

일본 경찰이 '출판법에 의한 정식 허가를 얻은 후에야 인쇄물을 배포할 수 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행사 당일까지 인쇄물 배포를 허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날을 위해 어려운 살림에도 거액을 들여가며 선전지 2만1천여장을 준비해놓은 소년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정식 출판 허가만 마냥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천도교회월보는 "세상의 많은 형제에게 '어린이의 날'임을 알려놓고 그만 이 지경을 당하여 놓았으니 우리들의 마음성이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라며 "자못 하늘을 우러러 긴 한숨 지었을 뿐이외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당일 오후 1시에 가까스로 '사후 수속(검열)'을 조건으로 하는 선전물 배포를 허가받을 수 있었고, 소년회는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행인들에게 선전물을 나눠주는 등 어린이날의 탄생을 방방곡곡 알릴 수 있었다.

이날 천교도당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어린이날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설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씨는 회고록에서 "회장에는 수 천 명의 어린이들이 모였고 어른들도 많았다"며 "방정환 선생께서는 높은 단에 올라서서 '어린이날'을 새로 꾸민 것, 어린이를 위해야 된다는 것을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힘 있게 연설하셨다"고 말했다.

장정희 방정환연구소장은 "일본은 어린이 운동을 독립운동으로 간주했고 그 규모가 점점 커지자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며 "1938년부터는 어린이날 기념식을 아예 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