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가족 없었으면 겪은 일 온세상에 알렸을 것" 속내 토로
추심금 소송은 졌지만…구순 앞둔 국군포로 "권리 찾으면 족해"
"북에 자식 둘을 두고 왔는데 애비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지난 20일 국군포로 한모(88)씨는 연합뉴스와 통화하며 그동안 인터뷰를 망설였던 속내를 어렵사리 털어놓았다.

한씨는 1950년 초부터 내무성 건설대에 배속돼 40여 년 동안 북한 탄광에서 강제노역하다 2000년대 초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다.

강제노역에 대한 손해배상금을 받기 위해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등 국군포로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다.

혹여나 자신의 행보가 북에 남은 아들·딸에게 해가 될까 봐 한씨는 지금까지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피해왔다고 한다.

한씨는 "북한 땅에 새끼들이 없으면 뭐가 두려워서 이야기를 못 하겠어요"라며 "만약 그랬다면 온 세상에 대고 제가 겪은 일을 방송하겠어요"라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한씨는 포로로 잡혀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양을 다 채워오지 못하면 시간을 연장해서라도 채굴해야 했어요"라며 "그야말로 '악마의 땅'에서 벗어났지. 자유라는 건 없고, 울타리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에요"라고 회상했다.

폐암 투병 중인 한씨는 전날 항암 치료를 받아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최근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며 한씨는 외부 접촉도 멀리한다고 전했다.

한씨는 "3천미터 땅굴 아래에서 40년 넘게 일했는데 그곳이 공기도 안 좋고 고열이고 온몸으로 석탄 가루를 다 먹으니 사람이 견뎌내겠습니까"라며 "대다수 국군포로가 앓는 흔한 병"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까지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80명 중 현재 남아있는 국군포로는 15명이다.

탄광에서 수십 년 일한 탓에 대다수 국군포로가 폐암 등 호흡기 질환과 허리 질환을 상흔처럼 안고 있다.

한씨는 "다들 돌아오셔서 잘 먹고 오래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은 다 가고 없지"라고 씁쓸하게 덧붙였다.

최근 추심금 청구 소송에 패소한 것에 대해 아쉽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씨는 "사실 (원심 승소도) 기대를 안 했습니다.

거기서 승소했으니 반 정도 찾았다고 생각해요"라며 "권리만 되찾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라고 힘있게 말했다.

2020년 7월 한씨는 국군포로 노모씨와 함께 북한 정부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북한이 국군포로에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한 국내 첫 사례다.

하지만 이들이 이를 토대로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라며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을 상대로 제기한 추심금 청구 소송에서는 최근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국군포로들은 지난 17일 서울동부지법의 결정에 불복해 항소장을 제출했으며 명예 회복을 향한 투쟁을 이어갈 방침이다.

정수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장은 23일 통화에서 "중앙지법에서 승소한 것을 보고 또 다른 5명의 어르신들이 2차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며 "속으로 '그게 되나' 했던 어르신들이 용기를 얻은 순간"이라고 그 의미를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