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에 사는 A씨는 2017년 6월 같은 교회를 다니던 지인에게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암호화폐거래소에 130만원을 주고 계좌를 개설하면 15개월 동안 한 달에 280만원씩 준다’는 것이었다.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된 A씨는 지인 2명과 함께 총 1억1300만원을 넘겼다.

이는 다른 투자자를 데려오면 그 투자금의 20%를 떼어주는 ‘폰지 사기’였다. 서울 광주 창원 등 전국 곳곳에서 자행된 ‘에어비트 사건’의 일단이다. 이 사건으로 지금까지 재판에 넘겨진 회사 임직원은 25명. 대표인 장모씨는 총 873억원을 뜯어낸 혐의로 2019년 징역 6년을 선고받았지만, 피해자 구제는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암호화폐 투자 열기를 틈타 투자자 돈을 가로챈 사기 범죄의 5년간 피해액이 5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 금융 사기로 지목돼온 보이스피싱 피해액보다 70% 이상 많다. 지난해 암호화폐 사기를 저질러 경찰에 붙잡힌 인원도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5년간 5兆 피해…암호화폐 사기, 보이스피싱 뛰어넘었다

암호화폐 사기 역대 최다

16일 경찰에 따르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지난해 암호화폐 사기 범죄와 관련해 862명을 검거했다. 2017년 7월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최다 인원이다. 2018년(139명)과 비교하면 6.3배로 늘었다. 혐의별로는 △암호화폐 유사수신·다단계 판매 772명 △거래소 내 사기 횡령 등 48명 △기타 구매대행 사기 등이 42명이다.

2017~2021년 암호화폐 사기 피해액은 4조7000억원에 달했다. 여기에는 역대 최대 암호화폐 사기 범죄로 꼽히는 브이글로벌 사건(2조2000억원)이 포함돼 있다. 브이글로벌 사건 피해액은 2020년 금융계를 뒤집어놨던 사모펀드 사태 피해액(라임자산운용 1조6000억원, 옵티머스운용 5000억원)을 크게 웃돈다. 암호화폐 사기 피해액은 같은 기간 보이스피싱 피해액(2조7079억원)보다도 73.5% 많은 규모다.

한국경제신문이 2019년 1월부터 최근까지 암호화폐 사기를 저질러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판결문 50건을 분석한 결과 암호화폐 사기는 신규 투자자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떼어주는 ‘폰지 사기’, 시세 조종으로 차익을 얻는 ‘펌프 앤드 덤프’ 등 기존 금융시장의 사기 수법이 그대로 쓰였다. 최근 수년간 ‘코인 광풍’이 불면서 사기 수단으로 암호화폐가 활용됐을 뿐이었다.

어떤 사기 통했나

암호 화폐 사기의 가장 흔한 수법은 다단계 판매 사기다. 자신들이 발행·운영하는 암호화폐나 거래소에 일정 금액을 투자하면 일정 수익을 돌려준다고 속이는 식이다. 이들은 암호화폐 발행, 투자자 모집, 홍보자료 배포 등 역할을 나눠 범죄를 저질렀다.

범행에는 기존에 구축해 놓은 다단계 조직을 활용했다. 대부분 수년 전부터 서울 강남과 구로 일대에서 옥장판, 안마기 등을 팔며 암약한 곳이다. 한상준 법무법인 대건 변호사는 “암호화폐 다단계 업체만 전국에 1000여 곳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암호화폐거래소 ‘올스타빗’ 대표 김모씨(46)는 투자자 수천 명에게 3000여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2020년 2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암호화폐 사기를 저지르기 전 “보험상품, 명품직구 대행사업에 투자하면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폰지 사기를 먼저 벌였다. 투자금을 돌려막다 손해가 막심해지자 새 돈을 끌어오기 위해 눈을 돌린 게 암호화폐 다단계 사기였다.

2020년에는 “비트코인 거래로 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 수억원을 가로챈 일가족이 검거됐다. B씨 부부는 암호화폐 거래회사 지점장 등의 행세를 하며 총 30명에게 총 9억7710만원을 받아 챙겼다.

범행에는 아들 C씨도 가담했다. 이들은 2020년 10월 각각 징역 3년6개월과 2년을 선고받았다. “자동 프로그램을 통해 매일 10%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며 피해자 11명에게 1억3900만원을 갈취한 D씨는 사기죄로 2020년 4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특금법’ 시행에도 범죄 반복

판결문 속 피고인 90명 중 15명은 사기죄 전과가 있었다. 암호화폐 개발업체 대표인 E씨는 2016년 5월 사기와 유사수신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집행유예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코인을 통해 투자자에게 212억원을 갈취하는 범행을 다시 저질러 재판에 넘겨졌다.

문제는 암호화폐 사기 등을 막기 위해 지난해 9월 특정금융정보이용법이 시행됐지만 그 뒤에도 사기 범죄가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거래소에 대한 규제·감독만 강화됐을 뿐 사기 범죄를 막을 예방책이 미흡한 탓이다.

암호화폐의 법적 근거가 없는 탓에 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은 범죄 피해 접수도 못 하고 있다. 강성신 법무법인 해내 변호사는 “암호화폐 사기는 피고인이 사업을 하려고 하다가 실패했다고 해버리면 혐의 입증이 쉽지 않다”며 “황당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투자자 스스로 조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양길성/최다은/최예린/장강호 기자 callm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