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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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현행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 처벌법) 제30조 6항에 위헌 결정을 내린 뒤 후폭풍이 뜨겁다.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등 17개 여성단체 소속 활동가 23일 헌재의 결정에 항의하려 24일 집회를 열었다.

이들 단체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그동안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피고인 방어권 보장뿐 아니라 피해자 보호 및 권리 보장도 중요한 인권이자 국가의 역할임을 강조해온 시대적 변화를 역행했다"며 "이제 미성년 피해자들은 성폭력 사건과 무관한 과거 이력에 대한 질문, 피해에 대한 의심,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에 고스란히 노출될 상황에 부닥치게 됐다"고 성토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또한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아동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피해 강요하는 가해자 반대신문권에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장 박수진 변호사는 "헌재 다수의견은 해당 조항이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항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단했다"면서 "이 판결의 핵심은 피해자 진술을 녹화영상의 형식으로 듣는 것은 피고인에게 반박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아동 성폭력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법정에 직접 출석해서 진술하라는 얘기다"라고 전했다.

이어 "성폭력 재판에서 진술증거의 신빙성 및 증명력 판단을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보장을 통해서 확보하려는 발상 자체가 문제다"라며 "지금까지 피해자 진술 영상물은 미성년 피해자의 표정·어조 등 ‘태도 증거’를 확연히 드러내기 때문에 허위의 개입 여지가 적고 신용성이 높게 보장된 증거다. 또한 아동 성폭력 피해자를 직접 반대 신문할 수는 없지만 피고인은 조사에 동석한 신뢰관계인에 대한 증인신문을 통해 진술 내용을 왜곡이나 오류를 따져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와 진술을 위축시키고 사법절차 안에서 추가적인 2차 피해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려스럽다"면서 "앞으로 이뤄지는 미성년자가 피해자인 성폭력 재판에는 미성년자 진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법원 재판 실무상 대부분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채택하고 아동 성폭력 피해자를 직접 법정에 아동을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피해 아동·청소년이 수사기관뿐 아니라 1·2심 법정에서 적어도 1차례 피해를 진술해야 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아동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에서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도 받아야 하며, 연령이 어린 대다수 아동의 경우 법정에서 증언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질문의 법적 사회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반대신문 과정에서 피고인 측의 유도신문이나 암시적 질문 등 부적절한 신문 방법에 의해 기억과 진술이 왜곡될 가능성도 커서 아동 성폭력 피해에 무죄가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헌재는 지난 23일 19세 미만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특례법에 대해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동안 성폭력 재판에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아도 이를 영상으로 녹화한 진술이 있다면 증거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동 성폭력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법정에 직접 출석해서 진술해야 하게 된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8살 입양 딸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도 아이가 먼저 유혹했다고 변명하거나 손녀뻘 초등학생 피해자 상대로 8년간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면서 "이제는 가해자 측이 무죄 입증과 형량을 줄이기 위해 이렇게 가해자에게 유리한 질문으로 피해자를 몰아붙이는 걸 아동·청소년들도 견뎌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친부가 아동을 성폭행한 사건일 경우, 이제 영상녹화물을 제출하는 것이 위헌 결정으로 불가능하게 됐기에 직접 아동이 법정에 나와야 한다"면서 "법정이 아니라 법정 옆에 마련된 다른 장소에서 영상 중계가 된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피해 아동은 친부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려 직접 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후 피해자는 가해자 측에서 하는 반대신문에 답변해야 한다. 반대신문은 보통 변호사가 하겠지만 피고인인 친부가 할 수도 있다"면서 "친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동의 마음은 어떨까. 더욱이 아동 옆에는 보통 신뢰관계자가 동석하는데, 보통은 친모다. 가족 관계에서 발생한 아동 성폭력 사건에서 친모가 가해자 편에 서는 경우를 봐 왔다. '아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 딸이 유혹했다'고 진술한 경우도 있었다"고 꼬집었다.

승재현 연구위원은 "헌재 위헌 요지인 피고인 방어권 보장을 하면서도 2차 피해를 막을 방안이 중요한데 일반 형사사건에서 진실을 찾아가기 위한 반대신문권은 필요하고, 피고인 방어권의 핵심이 된다"면서 "그러나 아동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도 있다. 어떤 경우는 피고인의 방어권보다 피해자의 2차 가해를 막는 게 더 헌법에 합치될 때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소한 법정에서 아이가 진술하는 공간이 놀이터처럼 꾸며져 있고, 카메라도 아동이 의식하지 못하게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또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한 제3의 진술조력인이 가해자 측의 질문을 이어폰으로 듣고, 피해 아동에게 대신 질문하도록 하는 방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족간 성폭행사건에서는 가해자 친족이 신뢰관계자로 동석해서는 안 된다"면서 "마지막으로 재판장의 소송지휘권으로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갈수 있는 피고인측 질문은 제지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부연했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