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사적제재 허용하면 인격권 침해할 수 있어"…1심 판결 뒤집어
구본창씨 "양육비는 아이들의 생존권, 선고결과 참담하다"

'배드파더스(Bad Fathers·나쁜 아빠들)'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며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신상을 공개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구본창(58)씨가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양육비 미지급자 신상공개 '배드파더스' 대표 2심서 무죄→유죄(종합)
수원고법 형사1부(윤성식 부장판사)는 23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구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벌금 100만원의 선고를 유예했다.

선고유예란 가벼운 범죄에 일정 기간 형의 선고를 보류했다가 면소(공소권이 사라져 기소되지 않음)된 것으로 간주하는 판결이다.

재판부는 "양육비 지급과 관련한 문제는 개인 간의 채권·채무가 아닌 공적 관심 사안인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사인이 양육비 미지급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사적 제재가 제한 없이 허용되면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이 사건 신상정보에는 신원을 특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얼굴 사진을 비롯해 세부적인 직장명까지 포함돼 있는데, 과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런 정보가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배드파더스의 신상정보 공개 기준도 적정하지 않다고 봤다.

재판부는 "양육비 이행법은 당사자에게 소명 기회를 주고, 다수가 참여한 심의를 거치는 등 여러 단계를 거쳐 공개 결정을 한다"며 "반면 배드파더스는 양육비 채무 기간이 도래하지 않은 사람을 명단에 게시하고, 항의를 했는데도 제때 삭제하지 않는 등의 사례가 발견되는 등 글 게시와 삭제에 관한 처리기준이 일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피고인은 양육비 문제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이혼 가정의 고통을 해결해주기 위해 이런 행위를 해 참작할 배경이 있고, 사적인 이익을 취한 것이 없다"며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도 기여한 바 있다"고 선고 유예를 결정했다.

선고가 끝나자 방청객들은 "어떻게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있느냐", "도대체 새로운 법은 왜 시행한 것이냐"는 등의 불만을 쏟아냈다.

구씨는 취재진에 "양육비는 아이들의 생존권이나 다름없는데 이런 판결이 나올 줄 몰랐다"며 "참담하다"고 말했다.

앞서 배드파더스 사이트 운영 3년여 만인 지난 7월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출국금지·운전면허 정지 등의 조처를 하는 내용이 담긴 '양육비 이행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양육비 이행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됐다.

법 시행에 따라 구씨는 지난 10월 배드파더스 사이트를 폐쇄했고, 여성가족부는 지난 19일 해당 법률에 따라 양육비 채무자 2명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사상 처음으로 공개했다.

공개된 신상정보에는 이름, 생년월일, 직업, 근무지, 양육비 채무 불이행 기간, 채무금액 등 6개 항목이 포함됐다.

다만 얼굴 사진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편 구씨는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라고 제보를 받은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포함한 신상정보를 배드파더스 사이트에 공개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지난해 1월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7명 전원 무죄 평결을 받고 "피고인의 활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구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지난해 9월 처음 열렸으나, 당시 헌법재판소가 분명한 사실을 공표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형법 307조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조항의 위헌 여부를 심리함에 따라 재판이 잠정 중단됐다.

헌재는 지난 2월 재판관 5(합헌)대 4(일부 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정보의 전파 속도가 빨라지고 파급 효과도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입법 목적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헌재 결정 후 지난 10월 다시 열린 2심에서 구씨는 "배드파더스 사이트 운영 과정에서 거의 1천여 건의 양육비 미지급 사례를 해결했고, 그 이후 법이 바뀌었다"며 "제가 한 일로 인해 많은 아이가 양육비를 받게 돼 후회가 남지 않는다"고 최후 진술을 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유죄를 선고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