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극이지만 유쾌한 블랙코미디…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팬데믹 시대에 수백 명이 함께 마음껏 웃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을 보기 위해 19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에 모인 관객들은 마스크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150분간 이어지는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슬랩스틱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거의 반자동적으로 웃음이 터진다.

2013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래 주요 시상식을 휩쓴 '젠틀맨스 가이드'는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코미디 장르의 작품이다.

2018년 국내에 처음 선보였을 당시 누적 관객 수 6만3천명, 객석점유율 92%를 기록하며 성공했다.

지난해 재연에 이어 최근 세 번째 시즌의 막을 올렸다.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가난한 청년 몬티 나바로가 명문가 다이스퀴스의 백작 지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몬티는 여덟 번째라는 멀고 먼 순서에도 굴하지 않고 선순위 후계자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의도치 않게 첫 살인을 저지른 그는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지렁이도 언젠가 직립 보행을 할 수 있다"는 신분 상승의 꿈을 꾸며 살인극을 지속한다.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웃길 수 있는 이유는 몬티가 기상천외한 수법을 동원해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스케이트장에서 애인과 밀회를 즐기는 바람둥이는 톱으로 얼음을 썰어 물에 빠뜨려 죽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군인은 역기에 깔려 죽게 한다.

거기다 대부분의 다이스퀴스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로 묘사돼 관객의 죄책감마저 덜어준다.

살인극이지만 유쾌한 블랙코미디…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는 이 블랙 코미디에 정점을 찍는다.

그중에서도 다이스퀴스 가문 사람 9명을 혼자서 연기한 정성화의 호연은 단연 눈에 띈다.

늙은 목사부터 시작해 돈에 눈이 먼 자선사업가 부인, '발연기'로 유명한 여배우, 남자가 더 좋다는 지주 등 여러 캐릭터를 풍자를 가득 담아 선보인다.

말투뿐만 아니라 목소리나 행동거지도 자유롭게 변주하고, '말맛'을 살린 대사로 관객을 계속 피식거리게 만든다.

몬티 역의 고은성 또한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과장된 몸짓으로 가벼운 분위기를 끌어나간다.

뮤지컬 넘버에도 개그 코드가 군데군데 숨어 있는데, 캐릭터 고유의 성격이 드러나는 가사를 찾는 재미가 있다.

음악감독 양주인이 대본을 번역한 김수빈과 함께 국내 관객을 겨냥한 한국어 가사를 붙였다.

양 감독은 공연 소개에서 "코미디가 어려운 장르다 보니 여러 해석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며 "치밀하고 고급스럽게 쓰인 음악이 작품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김동연 연출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웃고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 이토록 조심스러웠던 적이 있었나"라고 물으며 "인간의 솔직한 욕망과 허망한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어 이 웃음 앞에 더 진지해지고,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몬티 역은 고은성을 비롯해 유연석, 이석훈, 이상이가 맡으며 다이스퀴스는 정성화와 오만석, 정문성, 이규현이 연기한다.

내년 2월 20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