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노후 수전설비는 '시한폭탄'…주민들은 불안 호소
전국 아파트 42.7% 20년 이상 됐고 30년 이상도 112만호

[※ 편집자 주 = 전국 곳곳의 노후 아파트는 정전과 전쟁 중입니다.

정전이 발생하면 주민들은 무방비 상태로 폭염이나 한파에 노출되고, 복구 후에도 인덕션 전기레인지나 에어컨 등 전력 소모가 큰 가전제품을 마음 편히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전기 사용량은 매년 증가하지만 오래된 아파트의 수전(受電) 용량은 준공 당시 그대로여서 자꾸 탈이 납니다.

설비를 교체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현실적 어려움이 많습니다.

전열기기 사용량과 난방 수요가 증가하는 겨울이 또다시 다가오고 있기도 합니다.

연합뉴스는 뉴스통신진흥회 제4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 최우수작 「노후 아파트는 '정전'과의 전쟁 중」(서울여대 최지은·유경민·김유진·정윤경)을 재구성해 노후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에너지 기본권' 피해 실태와 개선책 마련을 위한 기사 4편을 이틀에 걸쳐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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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탐사팀 = "에어컨, 전자레인지, 다리미, 에어프라이어 다 쓰지 말라고 하고…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추석 때 인덕션 사용을 자제하라고 하길래 음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코로나19로 집에만 머무르는 사람도 많은데 연휴 때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
서울 양천구 A아파트에서 만난 주민 장미희(37)씨는 단지 내 곳곳에 붙은 '전력 사용 자제' 안내문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관리사무소가 약 한 달간 가전제품 사용 자제를 당부하자 견디다 못해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A아파트는 준공된 지 34년이 지난 노후 아파트다.

[정전위기 노후아파트] ① 올 7월만 210건…잇단 사고에 '정전 노이로제'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9월 13일 A아파트에서 10시간 동안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1천300세대에 전기 공급이 끊겼고 주민 10명이 멈춘 승강기에 갇혔다.

당시 승강기에 타고 있었다는 채모(48)씨는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켜고 승강기 벽면에 있는 업체 관리자 연락처로 전화를 해봤지만 도움을 바로 받을 수 없었다"며 "엘리베이터가 추락할까 봐 두려워 온몸이 땀범벅인 채로 10여분을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원 수업 등을 비대면 수강하던 학생들은 인터넷 접속이 끊기자 10시간 내내 애를 태웠다.

주민 김희서(19)양은 "코로나19로 학원 수업도 비대면으로 진행하는데 종일 수업도 못 듣고 공부도 못 했다"며 "수능 두 달 전 이런 일이 생겨 불안해서 스터디카페나 독서실을 알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정전위기 노후아파트] ① 올 7월만 210건…잇단 사고에 '정전 노이로제'
◇ 아파트 정전 매년 증가…주민들 '노이로제' 호소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전국에서 발생한 정전 사고는 7월에만 210건에 이른다.

하루 7번꼴로 정전이 일어난 셈이다.

최근 3년간 아파트 정전 건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전력이 접수한 정전 신고로만 따져도 2019년 205건, 2020년 271건, 올해에는 9월까지 316건이었다.

정전 사고는 주로 노후 아파트에서 발생한다.

변압기나 차단기 등 아파트의 주요 수전설비가 고장 나면서 정전으로 이어진다.

한전 전력연구원(KEPRI)에 따르면 25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의 정전 발생률은 15년 미만 아파트보다 7.4배 높다.

취재팀은 올해 정전이 발생한 노후 아파트를 찾아가 관리사무실과 주민들로부터 당시 피해 상황과 정전 이후 변화한 일상에 대해 들어봤다.

1977년 준공된 서울 강남구 B아파트에서도 지난 7월 21일 자정 무렵 갑작스럽게 일어난 정전으로 384세대가 불편을 겪었다.

정전 발생 한 달 후 만난 B아파트 주민들은 '정전 노이로제'를 호소했다.

장을 보고 귀가하던 주민 박모(54)씨는 절반도 차지 않은 장바구니를 내밀며 "또 정전되면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다 버려야 하니 장을 조금밖에 못 봤다"고 했다.

20년간 이곳에 살며 2~3년마다 정전을 경험했다는 그는 "언제 또 정전이 일어날지 모르니 하루 먹을 양만 장을 봐 오는 게 습관"이라고 말했다.

[정전위기 노후아파트] ① 올 7월만 210건…잇단 사고에 '정전 노이로제'
◇ 폭염에 전기 끊겨 '손풍기'로 버텨…한파 속 정전도
정전 발생 후 복구가 늦어지면 주민들의 고통은 더 커진다.

지난 7월 28일 경기 부천시 C아파트에서는 918세대에 정전이 일어나 길게는 4일간 전기가 끊겼다.

정전 발생일인 7월 28일은 낮 최고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갔고 폭염경보가 발효 중이었다.

C아파트 주민 박춘희(60)씨 가족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3일을 버텼다.

자녀들은 회사에서 충전해 온 휴대용 선풍기를 손에 쥐고 겨우 잠들었다.

시에서 나눠준 아이스팩을 냉장고에 넣었지만 음식은 금세 상했다.

박씨는 "겉보기로는 몰라서 다음날 냉동 만두를 쪄 먹었다가 다 토할 뻔했다"고 했다.

1994년 준공된 이 아파트 11층 거주자인 이경숙(60)씨는 무릎 수술을 2차례 할 정도로 무릎이 좋지 않았지만 정전으로 승강기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는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두 번 정도 하니까 못하겠더라"며 "다른 아파트는 점검을 미리 해서 정전을 예방했다고 하는데 답답하다"고 말했다.

아파트 측에 따르면 정전은 전력량 증가로 변압기 온도가 상승해 전력 공급선 피복이 벗겨져 합선이 일어난 결과로 파악됐다.

이 아파트에서는 과거부터 1~2개동 단위의 소규모 정전이 여러 차례 반복돼 온 터라 변압기 용량을 늘리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

겨울에 발생하는 정전도 가혹하다.

겨울철에 전기공급이 끊기면 전기로 가동되는 난방·온수 설비 가동도 중단돼 난방은 물론 온수도 쓸 수 없다.

한전 관계자는 "난방이 정전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정전이 나면 난방, 온수 등을 가동할 수 있는 동력이 끊겨 모든 게 끊긴다"며 "노후 변압기를 관리하지 않으면 고장이 날 수밖에 없으니 아파트 관리자는 물론이고 입주민도 함께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 송파구 D아파트에 사는 2천여세대 주민들은 한파주의보가 발령됐던 2019년 2월 정전을 겪었다.

지난 9월 27일 만난 주민 윤영화(65)씨는 "(2년 전) 정전이 발생했을 때 난방이 안 돼 덜덜 떨었다"며 "올겨울에 정전되면 온수도 안 나오고 전기장판도 안 켜질 텐데 4살, 6살 된 손주들이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정전은 일부 아파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파트의 42.7%(497만호)가 20년 이상, 9.6%(112만호)는 지은 지 30년 이상 된 아파트다.

정부도 오래된 아파트의 전기 관련 사고 예방이 중요하다고 보고 25년 이상 노후 공동주택은 3년 주기로 전기 안전 점검을 받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 전기안전관리법을 올 4월 시행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