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듣기에 따라서는 궤변 같지만 그분은 남하구 다른 묘한 철학을 지니구 계셨습니다.”

“그걸 한번 들려줄 수 없소?”

“그분은 세상이 어지럽구 더러울 때는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다구 하셨습니다. 세상을 좀 더 썩게 해서 더 이상 그 세상에 썩을 것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썩지 않게 고치려구 했다가는 공연히 사람만 상하구 힘만 배루 든다는 것입니다. ‘모두 썩어라, 철저히 썩어라’가 그분이 세상을 보는 이상한 눈입니다. … 그분은 사람만이 지닌 이상한 초능력을 믿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철저히 썩어서 더 썩을 것이 없게 되면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언젠가는 스스로 자구책을 쓴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 자기 생각을 부정(不正)의 미학이라는 묘한 말루 부르시기두 했습니다.”<중략>

“… 그분을 언제나 ‘미련한 놈’이라구만 부르셨습니다.”

오일규다. <중략>

“… 그 미련한 놈이 죽어 버렸으니 자기도 앞으로는 미련하게 살밖에 없노라구 하셨습니다. 당신이 미련하다고 말씀하는 건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착한 일을 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 이곳에 오신 후로는 그분은 거의 남을 위해서만 사셨습니다. 제가 생명을 구한 것두 순전히 그분의 덕입니다.”

나는 다시 기범이 지껄였던 과거의 요설들이 생각난다. 세상을 항상 역(逆)으로만 바라보던 그의 난해성이 또 한 번 나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그는 어쩌면 이 세상을 역순(逆順)과 역행(逆行)에 의해 누구보다 열심으로 가장 솔직하게 살다 간 것 같다. 그에게 악과 선은 등과 배가 서로 맞붙은 동위(同位) 동질(同質)의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악과 선 중 아무것도 믿지 않았고 오직 믿은 것이라고는 세상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와 오일규가 맞부딪쳤을 때 오일규가 해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가장 비열한 삶이 가장 올바른 삶을 해체시키는 역설적인 예인 것이다. -홍성원, ‘무사와 악사’-



그분… 사람… 당신… 오일규… 제… 나… 기범

시가 정서를 노래한다면, 소설은 인물을 이야기한다. 인물의 삶과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술자가 인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소설의 일반적인 방식이나, 인물이 또 다른 등장인물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자주 사용된다.

이 작품은 서술자가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에 따라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나’가 자신을 ‘제’라고 지칭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데, 화제는 ‘그분’ 또는 ‘당신(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나 나온 바 있는 사람을 도로 가리키는 삼인칭 대명사인 ‘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이라는 인물로서, 곧 ‘기범’이다. ‘그걸 한번 들려줄 수 없소?’라고 하는 것을 보면 ‘나’는 ‘기범’의 행적을 모르고, ‘제’는 그것을 전한다. 그런데 ‘그분은 사람만이 지닌 이상한 초능력을 믿’었다는 ‘제’ 말에 의하면, ‘기범’은 ‘사람’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해 말했던 것 같다. 또한 ‘기범’은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서 누군가를 ‘제’에게 말했는데, ‘나’는 그 사람이 ‘오일규’라고 알아차린다. 그러면서 ‘나’는 ‘기범’과 ‘오일규’를 관련지어 서술한다. 이처럼, 복잡하게 인물들이 다른 인물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이 있는데, 그 경우 등장인물을 지시하는 말이 복잡하여 누가 누구를 말하는지 헷갈리기 쉬우므로 이런 소설을 읽을 때는 그 점을 유의해야 한다.



궤변 … 묘한 철학… 이상한 눈… 이상한 초능력… 부정(不正)의 미학이라는 묘한 말… 미련한 놈… 요설들… 역순(逆順)과 역행(逆行)… 비열한 삶이 가장 올바른 삶

‘철수 샘은 교사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러면 ‘철수 샘은 학생이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 또한 사실이다. 다만 전자는 참인 사실 즉 참말이고, 후자는 거짓인 사실, 즉 거짓말이다. 그러면 ‘철수 샘은 멋쟁이다’는 사실일까? 사실이 아니다. ‘철수 샘은 멋쟁이가 아니다’ 또한 사실이 아니다. 이 두 진술은 의견이다. 의견은 객관적인 사실과 달리 주관적인 것인데, 평가도 그 의견의 하나다. 소설에서는 인물에 대한 평가들을 담고 있다. 서술자가 인물에 대해 평가하거나 인물들이 서로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먼저 ‘기범’의 생각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궤변’은 상대편의 사고를 혼란시키거나 감정을 격앙시켜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대는 논법으로, ‘기범’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반대로 ‘제’는 ‘그분은 … 묘한 철학을 지니구 계’시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제’는 ‘기범’이 ‘이상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기범’을 정상적이지 못하다, 별나다, 또는 알 수 없는 데가 있다고 평가한 말이지만, ‘기범’을 긍정적으로 보는 ‘제’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편 ‘기범’은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송두리째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을 ‘이상한 초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그런 자신의 평가를 ‘부정(不正)의 미학’이라고 평가한다. 올바르지 아니하거나 옳지 못함을 뜻하는 ‘부정’은 ‘미학(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아마도 ‘기범’은 자신의 인간관을 역설적인 말로 평가했던 것 같다. ‘제’ 또한 그렇게 생각해서 그 평가를 ‘묘한 말’이라고 했다.

‘기범’은 ‘오일규’를 ‘미련한 놈’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미련’은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릴 정도로 매우 어리석고 둔함을 뜻하는 고유어로, 또는 일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여 서투름을 뜻하는 한자어[未練]로 해석 가능하다. 어느 경우든 ‘기범’이 ‘자기도 … 미련하게 살밖에 없노라구’ 한 것이나 ‘제’가 그것을 ‘착한 일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을 보면, ‘미련’은 긍정적인 평가를 담은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범’의 말을 ‘요설(妖舌, 요사스러운 수작)’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삶을 순리에 어긋나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 풀이되는 ‘역순(逆順)과 역행(逆行)’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대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가장 비열한 삶’이라는 평가는 ‘기범’의 삶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그에 반해 ‘나’는 ‘오일규’의 삶을 ‘가장 올바른 삶’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처럼,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소설을 읽을 때는 평가와 관련된 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오일규가 해체되는 … 가장 비열한 삶이 가장 올바른 삶을 해체시키는 역설

‘해체(解體)’는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을 지향하려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제창한 말로서,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토대를 흔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숨겨져 있는 의미와 성질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즉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아마도 ‘오일규’는 ‘가장 올바른 삶’을 살았고, ‘기범’은 ‘가장 비열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릇된 삶과 옳은 삶은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기범’과 ‘오일규’가 같이 언급되면서, 악과 달리 선은 믿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흔들리고, ‘악과 선 중 아무것도 믿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 관심이 가게 된다. 즉 ‘악과 선은 등과 배가 서로 맞붙은 동위(同位) 동질(同質)의 것’이라고 해체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해체를 ‘역설’이라고 한 것이다. ‘해체’는 좀 어렵지만 고등학생 이상에서 알고 있어야 할 개념이다.

① 소설에서 인물이 또 다른 등장인물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자주 사용됨을 알아 두자.



② 복잡하게 인물들이 다른 인물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의 경우 등장인물을 지시하는 말이 복잡하여 누가 누구를 말하는지 헷갈리기 쉬움을 유의하자.

③ 의견은 객관적인 사실과 달리 주관적이며, 평가도 그 의견의 하나라는 점을 알아 두자.



④ ‘해체(解體)’가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토대를 흔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숨겨져 있는 의미와 성질을 발견한다는 뜻임을 알아 두자.